길위의단상

남 일 아니야

샌. 2016. 4. 3. 11:21

작년부터 병원 출입이 잦다. 올해는 방문 목록에 신경과가 추가되었다. 병원에 가 보면 아픈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안다. 하나같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는다. 건강할 때는 나와는 관계없는 일로 여겼다. 늙고 병든다는 건 먼 얘기였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달라지고 있다. 어린아이를 보면 손주 같고, 노인을 보면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휠체어에 탄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를 환갑은 족히 지났을 아들이 밀고 간다. 어머니 건강이 여의치 못하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으리라. 내 모습이 투영되니 심란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 몸뚱이 사정도 당장 내일 일을 모른다. 검사 결과에 따라 환자복을 입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사가 깃털만큼 가볍다.

 

그래선지 TV를 보다가도 슬픈 사연에는 감정이입이 잘 된다. 기쁜 내용에는 공감이 덜하다. 그래서 그리스 연극에는 비극이 핵심 모티브가 되었나 보다. 동병상련을 통한 눈물에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다. 잘 우는 것은 정신 건강을 위해 좋은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많아지는 것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너는 너고, 나는 나가 아니다. 네가 나고, 나가 너며, 우리는 한몸이라는 게 옳다. 내 웃음은 네 눈물의 반대급부로 얻어진 것인지 모른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지는 못하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고통이 나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자각 앞에서 미안하고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멀리서 보면 다들 행복해 보인다. SNS에는 밝은 미소 띤 사진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쓰라리지 않은 삶은 없다. 그것이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고, 나 자신까지 사랑으로 껴안을 수 있는 힘이 된다. 개고(皆苦)는 차라리 복음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느냐고 묻지 말라. 눈물은 바로 나를 위해서 흘리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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