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22)

샌. 2016. 4. 22. 09:06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월로 수학여행을 갔다. 1964년도였다. 기차를 타고 제천까지 가서 다른 열차로 바꿔타고는 영월에서 내렸다. 산골 촌놈들이라 기차를 처음 타 보는 아이들도 많았다. 기차 안에서는 의자 쿠션이 신기해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좋아라 했다.

 

첫날은 화력발전소를 견학하고 허름한 여관에 묵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여인숙 수준도 안 되는 집이었다. 저녁을 먹고는 오락 시간에 단체 춤판이 벌어졌다. 방 안에서 얼마나 뛰었는지 천정에서 떨어진 흙이 눈에 들어가 빼내느라 고생했다. 몇 명이 따라 나와서 도와주었다. 안에서는 유행가가 이어지는데 뒤뜰에서 쳐다본 밤하늘의 별들이 무척 아름다워 눈 아픈 핑계 대며 들어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둘째 날에는 장릉과 단종 유적지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 사진은 장릉에서 찍은 것인데 나는 담임 선생님 옆에 앉아 있다. 담임 선생님과 쌍둥이 포즈를 하며 다정해 보이지만 실은 야단을 맞고 난 직후였다. 내가 입은 옷이 너무 볼품없다면서 다른 아이 옷으로 갈아입게 했다. 그때는 새카만 교복 모양의 저 옷이 정장 스타일의 고급이었다.

 

내 옷은 허름한 잠바였는데 단추가 떨어져 핀으로 얼버무려 놓은 채였다. 아마 계절이 지난 옷인지도 몰랐다. 나보다 어렵게 사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나만 지적받은 게 무척 창피했다. 옷을 허름하게 입혀 보낸 부모님을 탓하는 말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자존심이 상했음에 틀림없다.

 

부모님은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은 아끼지 않았지만 옷이나 먹을거리에는 넉넉하지 않았다. 학교에 내거나 책 사는 돈에 대해서는 제때에 받아보지 못한 적이 없다. 시골에서는 그나마 잘 산다는 소리를 듣는 탓도 있었겠지만, 공부에 대한 지원은 다른 집과 비교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부를 떠나서는 살뜰하게 챙겨주는 면이 부족했다.

 

우리보다 훨씬 못 사는 집 친구는 가끔 원기소를 먹었다.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어쩌다 한 알 얻어먹을 때 원기소의 고소한 맛은 지금도 침을 고이게 한다. 옆집에서는 텃밭에 토마토를 심고 철이 되면 맛있는 간식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돈 되는 농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 때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중에 옷도 있었다.

 

옛날을 추억해 보면 고마운 기억보다 못된 기억이 끝까지 남는 것 같다. 지금 내 자식을 봐도 그렇다. 클 때 서운했던 얘기를 하면 나로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부모가 기억하는 내용과 자식이 기억하는 내용이 다르다. 분명 사실은 하나일 텐데 상반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부모 처지에서는 아무리 잘 해 주었다 한들 받아들이는 자식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 몇백 배 더 많다. 그런데 얄궂은 기억은 좋은 면은 망각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나쁜 면만 자꾸 드러낸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남의 옷을 입고 찍은 이 사진이 없었다면 아마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뇌의 기억도 과거의 어느 사소한 사건이 사진처럼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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