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졸혼

샌. 2016. 5. 15. 12:45

일본에서는 노년층에서 '졸혼(卒婚)'이 유행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혼인 관계를 졸업한다'는 뜻이다. 졸혼은 이혼이나 별거와는 다르다. 사이가 나빠서 갈라서는 게 아니라, 부부로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따로따로 각자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상대의 자유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비슷한 것으로 '해혼(解婚)'이 있다. 역시 '혼인 관계의 해제'라는 뜻이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남자가 가장의 임무를 마친 뒤 구도의 삶을 원하면 해혼식을 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간디는 삼십 대 후반에 아내와 해혼을 합의하고 인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인도에는 전통적으로 해혼 문화가 존재한다.

 

졸혼은 장수 사회의 한 단면도다. 대개 60대 중반이 되면 자식을 짝지어 보내고 부부만 남는다. 옛날 같으면 죽음이 가까웠으니 평생해로라는 말이 가능했지만, 백세 시대에는 30년 넘게 더 살아야 한다. 이때가 되면 그동안 억눌려왔던 자아 성취의 욕구가 되살아난다. 자유롭게 내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다.

 

사실 가족은 힘과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점이 더 많다. 더구나 노년의 구속은 견디기 힘들다. 30년을 함께 살면 지겨워질 법도 하다. 황혼 이혼이 젊은이들 이혼보다 비율이 높다. 그러나 남의 눈치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도 많다. 이런 부부에게 졸혼은 좋은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04년에 <졸혼을 권함>이라는 책을 쓴 스기야마 유미코는 졸혼을 이렇게 정의했다. "기존의 결혼 형태를 졸업하고, 자기에게 맞는 새 라이프 스타일로 바꾸는 것이다." 스기야마 부부는 25분 떨어진 아파트에 따로 살며 한 달에 두어 번 만나 식사를 같이 한다.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침대를 써야만 부부가 되는 건 아니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현상은 시차만 있을 뿐 우리나라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졸혼도 아마 우리의 신풍속도가 될 것 같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서 자아 성취 욕구가 강한 부부가 선호할 현상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유롭게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전통적인 가족 시스템도 조금씩 붕괴하고 있다.

 

새로운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소용이 되니까 생겨나는 것이다. 졸혼 외에도 앞으로는 다양한 결혼 양식이 생겨날 것이다.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변화하는 시대에 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도 점차 희미해져 간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은 이젠 결혼식 주례사에서도 듣기 어렵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졸혼도 그런 경향에서 이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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