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커피 기도 / 이상국

샌. 2016. 6. 22. 19:03

커피점에 온 모녀가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한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기도는 길어지고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느님도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실 텐데....

 

속으로 그러다가

기도를 마친 모녀가

커피를 마시는 걸 보고서야

나도 커피를 마셨다

 

- 커피 기도 / 이상국

 

 

천주교에 입교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성호경을 긋고 감사 기도를 바쳐야 한다고 배웠다. 배운 대로 온전히 실천하던 때였다. 청계산에 등산을 갔는데 여름이라 목이 탔다. 마침 산정 가까이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보통 하던 대로 돈을 내다가 흠칫했다. 막걸릿잔을 들고 성호경을 긋는 게 너무 이상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할까, 결국은 입맛만 다시며 돌아섰다. 이제는 뻔뻔해져서 감사 기도를 잊은지 오래되었다. 이 시를 읽다가 옛날 일이 생각났다. 난 당당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엄마와 딸과 시인, 세 사람의 풍경이 따스하다. 상대를 배려해 주는 마음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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