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과야 미안하다 / 정일근

샌. 2016. 7. 12. 15:13

사과 과수원을 하는 친구가 있다. 사과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과 속에서 더운 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사과꽃이 새치름하게 눈뜨던 저녁이었다. 그 날 나는 천 년에 한 번씩만 사람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툭,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 전에 영혼을 울리는 저 따듯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 향기 가득하다.

 

- 사과야 미안하다 / 정일근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채식주의자 한 분을 만났다. 고기를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인데, 과일조차 땅에 떨어진 것만 먹는다고 한다. 그분의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자리가 숙연해졌다. 비하면 내 먹는 습관은 비열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사람을 결정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요사이 일어나면 먼저 사과 한 알을 먹는다. 그런데 한 번도 감사하다는 생각 해 본 적 없다. 하물며 미안하다는 마음이 피어날 리 없다. 이 지극한 존경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난 아직 멀고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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