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피로사회

샌. 2016. 8. 4. 10:33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선생이 쓴 우리 시대를 진단하는 철학 에세이다. 100페이지가 안 되는 소책자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서양 문화의 비판서이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된다.

 

선생은 우리 시대를 성과사회로 규정한다. 과거의 규율사회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규율사회는 이미 사라졌다. 대신 피트니스 클럽, 외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다. 이 사회의 주민은 더 이상 '복종적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인이다.

 

그런데 성과사회는 긍정성 과잉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킨다. 그 결과 낙오자가 나타나고 우울증 환자가 증가한다. 성과주체는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성과사회라는 시스템 내에 존재한 폭력이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이 이런 과잉의 징후다.

 

우리 시대는 '깊은 심심함'을 잃었다. 깊은 심심함, 개인적으로 이 용어가 마음에 든다. 사색적 삶은 활동적 삶으로 대치되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없었다. 니체가 말했듯,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된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신경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노동하는 동물이 된다. 이것을 '지배 없는 착취'라 부른다.

 

현대인은 분노 대신 짜증과 신경질만 늘어간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분노가 없으면 사회 진보는 불가능하다. 세계는 점점 긍정적으로 되어 가는데 인간이 가진 부정성의 에너지는 약화되어 간다. 긍정의 과잉이 낳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이런 분열적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피로는 모든 공동체의 삶과 친밀함을 파괴한다.

 

책 말미에서 선생은 새로운 피로를 제시한다. 한트케가 말한 '화해시키는 피로'다.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영감을 주는 특별한 능력이다. 다른 말로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라고도 하며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놀이의 시간이다. 이 피로가 우리를 구원한다.

 

책 제목인 <피로사회>는 성과사회를 넘어 앞으로 도래할 희망의 사회라는 긍정적 의미도 들어 있다. 그동안의 진지한 논의에 비하면 결론이 좀 생뚱맞게 느껴진다. 세상을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로 양분해 재단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사회를 해석하는 틀로서 성과사회라는 개념은 상당히 유용해 보인다. 바로 우리의 현실을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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