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여보라는 말 / 윤석정

샌. 2016. 8. 21. 11:08

연애시절, 나는 은근슬쩍 당신에게 여보라고 불러봐 했더니

그 말이 어색했던 당신은 여보를 거꾸로 바꿔서

보여? 라고 묻고는 딴청을 피웠다

나는 느닷없는 물음에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당신은 나지막하게 사랑해라고 했다

 

결혼을 앞두고 사소한 이유로 다투던 날

당신은 내가 되어도 내가 아니 되어도 괜찮다고 했는데

나는 먹먹해져서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아니 된다고

당신이어야만 한다고 소리쳤다

당신은 내 마음이 보여? 라고 묻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눈을 감고 사랑해라고 속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은 이 세상 기꺼이 나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깜깜한 나에게 전부를 보여준 당신

당신은 겨울 꽃처럼 단아한 신부가 되었고

나는 잘 보이지 않는 어둔 세상에 살지라도

당신이 내민 손을 꼬옥 붙잡고 가겠다고 했다

 

새신랑이 된 나는 당신에게 보여? 라고 물었더니

당신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여보라고 말했다

여보라는 말이 어찌나 아늑하던지

나는 사랑해! 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내 마음이 보여? 내 사랑이 보여? 정말 내가 보여? 라고 묻지 않고

단지 여보라고 말할 것 같다

여보라는 말 입속에 가만히 숨겨둘 수 없어서

부르면 부를수록 보여줄 수 있는 사랑보다 더 커져만 가는 말

 

- 여보라는 말 / 윤석정

 

 

친척 형은 부부간에 존중하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 서로 존댓말을 쓰기로 하고 실천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서로 맞절을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부부 사이에 무슨 격식이야,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말이 그 사람의 생각을 담아내고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린 아직도 부부간의 호칭이 어정쩡하다. '자기'라고 했다가 '여보'라고 했다가 대중이 없다. 무심코 '자기'라고 부르다가 내가 머쓱해지기도 한다. 아직도 '여보'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 시를 보니 '여보'는 참 예쁜 말인 걸 알 수 있다. 너무 자주 쓰면 이 역시 심드렁해질까, 그래서 아껴서 쓰고 싶은 "여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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