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여행 / 박경리

샌. 2016. 8. 29. 08:40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여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히말라야의 짐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의 여행이든

사라졌다가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 여행 / 박경리

 

 

어쩔 수 없이 패키지여행을 따라갈 때가 있다. 편리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머물고 싶은 풍경이 있어도 허덕대며 쫓아다니느라 마음이 바쁘다.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하고, 주마간산 관광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눈으로 본 풍경과 사람이 가슴에까지 담겨야 여행이다. 그러므로 선생님처럼 현장에 가지 않는 여행도 가능하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여행인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지구별에 온 나그네들이다. 삶이 여행이며 꿈꾸는 모든 것이 여행이 아니겠는가. 문밖을 나서지 않은 사람이 가장 훌륭한 여행가가 될 수도 있다. '불출호지천하(不出戶知天下)'라고 한 노자도 멋진 마음의 여행가였다. 오늘도 삶이라는 여행의 새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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