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샌. 2016. 10. 10. 20:29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

 

-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한번도 좌파 소리 들어보지 못하고 산 게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큰소리 치다가는 좌파가 아니라 미친 놈 소리 듣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미 가슴도 식었다. 머리에는 아직 미열이 남아 있을지 몰라도.

 

동창 모임에 나가면 제일 고역이 석고처럼 보수화 된 친구들의 견해를 묵묵히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태클을 걸면 모두가 불편해지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문다. 싸우다가 친구를 잃기도 싫기 때문이다. 나는 싱싱한 청일점이야, 자위를 하지만 얼른 주제를 바꾸는 게 내가 할 일의 전부다. 어쩌다 비슷한 부류끼리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면 가뭄에 물 만난 고기가 된다.

 

이 시에는 피어 싱어의 다음과 말이 서두에 붙어 있다.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약자와 빈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착취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존재들이 느끼는 고통에 관심을 갖지 못한다면, 그리고 최소한의 삶의 조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주저한다면, 우리는 더는 좌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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