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림 / 신경림

샌. 2016. 10. 3. 11:27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맨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 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 그림 / 신경림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림 속 사람이 현실로 튀어나왔다 들어가곤 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다. 이런 건 판타지 영화에서 잘 써먹는 수법이다. '타임머신'이라는 이름 때문에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할 때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짐작하는데, 사실은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에 그리로 가는 통로가 있는지 모른다. 먼 우주여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바타'적 상상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제일 큰 게 아닐까.

 

육체를 가진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안 보인다. 이 자리에서 버텨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실의 삶이다. 그림의 구도를 정하고 등장인물을 만든 누군가가 있다면 비밀의 문을 어딘가에 만들어 놓았을지 모른다. 만약 비밀의 문이 있다면 특정의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숨겨 두었을 게 틀림없다. 그 문이 발견될 때 우리 삶과 우주의 비밀도 한 꺼풀 벗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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