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2016년 가을

샌. 2016. 11. 14. 17:15

충격적인 일이 닥치면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분노하게 되고, 그 뒤에는 우울증이 찾아온다. 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사회적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몇 주째 허탈과 우울증에 빠져 있다. 처음 사건이 불거졌을 때는 설마 그랬을까, 라고 생각했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분노하게 되고, 그 뒤로 우울증이 찾아왔다. 지금은 화를 내기도 지쳤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기력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

 

십 년 넘게 블로그를 하면서 거의 매일 글을 올렸다. 집에 있으면서 컴퓨터를 열지 않은 적은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텅 빈 듯해 도무지 글을 쓸 수 없다. 바깥나들이도 귀찮다.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바다 건너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가을은 더욱 쓸쓸해지고 있다.

 

"이게 나라냐?"라는 한탄이 깊다. 이젠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다. 용비어천가를 읊던 사람들이 독설을 쏟아낸다. 결단하지 못하고 권좌에 계속 미련을 두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슬프다. 결국은 탄핵으로 가게 될 것 같다. 난국을 어떻게 수습하느냐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라는 말을 다시 되새긴다. 이 국민적 분노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에너지로 승화되어야 한다. 국가 시스템이 개혁되는 계기가 된다면 이번 게이트는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일 수 있다.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아귀다툼의 지옥에서 이젠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양보하고 타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 우리나라가 재탄생한다면 좋겠다. 능력과 성장 대신 공정과 분배의 가치가 재조명되어야 한다.

 

지난 토요일의 백만 촛불집회를 통해 성숙한 시민 의식을 확인했다. 현수막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그렇다, 정신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개헌을 하고 아무리 제도를 바꾸어도 정신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젊은 세대에서부터 이런 각성의 바람이 분다면 우리나라는 충분히 희망이 있다.

 

분노가 새로운 비전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번 시민운동의 저변에는 사회 경제적 불균등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단순히 한 정권을 끝내는 문제가 아니다. 혼란스런 상황이 언젠가는 진정이 될 것이고, 내년에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새 정치는 이것을 시스템으로 담아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은 시대 흐름에 역행했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국정을 혼란케 했다. 주변에 간신배들만 넘쳐나도록 방치했다. 분명히 단죄를 받아야 한다. 2016년 가을의 진통이 우리나라에는 오히려 보약이 될 것이다. 이러면서 역사는 진보해 간다는 것을 믿는다. 눈앞의 상황만 보면 암담하지만 넓은 눈으로 보면 나라의 체증이 뚫릴 행운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이젠 우울을 걷고 힘차게 밖으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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