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금성인의 지극함

샌. 2016. 12. 23. 16:12

첫째 손주는 여자지만, 둘째 손주는 남자다. 커가는 모습을 보면 둘의 차이가 엄청나다. 아예 다른 종족이 아닌가 싶다. 여자와 남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 나오는 게 맞는 것 같다. 뇌 구조 자체가 다르다.

 

둘째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길가의 돌멩이와 막대기에 관심을 보였다.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잡고 던지고 하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나뭇가지만 잡으면 칼싸움을 하려고 덤벼든다. 돌멩이도 원시 시대의 무기였다. 수컷의 피에 흐르는 사냥과 전투 유전자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사내아이가 왜 돌멩이와 막대기에 본능적인 호기심을 가지는지 이제야 알겠다. 반면에 첫째는 이런 데는 아예 흥미가 없다.

 

성인이 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되어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손주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른 종족이 서로 맞추며 산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같은 언어를 쓰지만 실제는 통역이 필요할 때가 많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서로 다른 세상을 바라본다.

 

자식을 다 내보내고 자라나는 손주를 지켜보는 나이가 되었다. 이즈음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 새끼에 대한 여성의 지극함이다. 남성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다. 아무리 제 새끼라도 다 컸으면 저대로 살게 두면 좋으련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 새끼로 인한 노심초사가 끝이 없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집을 보아도 도긴개긴이다. 그것 때문에 부부간에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남자는 좀 이기적 성향이 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시집 장가 보내기 전까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자는 다르다. 아무리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안쓰럽고, 하나라도 더 도와주지 못해 조바심친다. 내리사랑은 그침이 없다. 자식에서 손주로 전이되며 강화된다.

 

이것은 여성의 위대함이라 부를 수 있지만, 동시에 여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가족과 핏줄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행위가 도리어 자식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 과잉보호가 자식을 반편이로 만드는 경우도 자주 접한다. 모성애의 빛과 그늘이다. 모성애라 부르지만 집착이라는 어두운 면도 있다.

 

어찌 됐든 여성의 자식에 대한 지극 정성만은 알아줄 만하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면이 많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십 년을 같이 살아도 두 성의 간격은 별로 좁혀지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다른 종족이기 때문이다. 금성인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화성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포기와 체념이 아니면 인생, 그중에서도 노년을 버티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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