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내 일상의 종교 / 이재무

샌. 2017. 4. 24. 19:49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 내 일상의 종교 / 이재무

 

 

걸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종교 의식에 빠졌을 때와 닮았다. 걸음 속에 자성(自省)과 위무(慰撫)가 있다. 그래서 걷는 일을 일상의 종교라고 말하는 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번잡함에 휩쓸리다가도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며 돌아설 수 있게 되는 것도 걸을 때이다. 더 고독해질 일이다. 내가 살 길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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