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샌. 2017. 4. 30. 12:51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대며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 사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문을 나서던 미아가 세바스찬과 주고받던 눈빛이 떠오른다. 꿈과 사랑 뒤에 숨어 있는 인생의 슬픔을 잘 드러낸 영화였다. 나이가 드니 봄도 이젠 예전의 봄이 아니다. 꽃이 화려할수록 속 한숨도 깊다. 그리움 풀어내기엔 우리 생은 너무 짧다. 순식간에 지나치는 봄처럼 인생도 아쉽게 지나가리라. 사월의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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