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잠 못 드는 조부모 가설

샌. 2017. 9. 21. 10:00

나이가 들수록 잠이 줄어든다. 불면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친구들도 많다. 잠이 들기도 어렵거니와 새벽에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도 힘들다고 한다. 늙으면 멜라토닌 분비가 줄어들어 생기는 현상이라고 의학에서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멜라토닌 분비를 늘리는 처방을 하면 될 것 같은데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노인이 되면 잠자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은데 실상은 반대다. 여기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있다. 인류가 동굴 생활을 할 때 적이나 맹수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밤에도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했다.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으면 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이 역할을 맡은 것이 노인이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낮에 활동을 많이 해야 하므로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 노인이 되면 잠이 없어지는 것은 이 같은 인류 진화의 산물이라는 설명이다. '잠 못 드는 조부모 가설'이다.

 

그럴듯한 해석이다. 원시공동체에서 노인이 대접만 받고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주를 보살피고,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역할과 함께 불침번도 있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인의 불면증은 질환이기보다 인류 진화가 남긴 처절한 흔적이 된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시대에도 손주 양육은 유효하지만, 불침번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때는 잠을 안 자는 노인의 효용성이 컸지만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고 오히려 노인을 괴롭히는 증상이 되었다. 그래도 불면증을 가족 사랑이라는 고귀한 유산이라고 생각하면 작은 위로라도 될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잠에 관한 한 별 변화가 없다. 10시에 침대에 들어가면 아침 7시가 되어야 깬다. 오줌 누러 한 번 정도 깨지만 금방 잠든다. 어쩌다 새벽 4시쯤 눈을 뜰 때가 있다. 그러면 일부러 책을 보면서 안 자려고 애쓴다. 그러나 성공할 확률이 별로 없다. 잠 못 드는 조부모 가설에 따르면 나는 집단에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어제 같이 바둑을 두던 사람은 대국 중에 연신 꾸벅꾸벅했다.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렇단다. 잠이 안 와서 한밤중에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단다. 장구한 인류 진화의 역사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설이 옳다면 말이다. 반면에 나 같은 사람은 종족 보전에 전혀 기여를 못한 셈이다. 괜히 미안해서 그랬나, 바둑은 왕창 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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