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샌. 2017. 12. 19. 18:26

은유 작가의 산문집이다.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글 참 잘 쓴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상의 이야기를 이만큼 맛갈스럽게 풀어내는 재주도 드물 것이다. 또한 글의 기저에는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이 들어 있다. 문체는 솔직하고 명쾌하며 통통 튀지만, 내용은 돌직구처럼 묵직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쉽게 보내주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여자, 존재, 사랑, 일의 네 가지 주제로 되어 있다. 삶의 현장에서 누구나 부딪치는 문제들이다. 작가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가족의 생계를 부담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더구나 예민한 감성이 작은 것 하나 허투루 흘리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여성의 시각에 대해 남성들은 무지한 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의 입장에 대해서 배우는 바가 많다.

 

이 책에서 제일 재미난 부분은 꽃수레가 나올 때다. 꽃수레는 작가의 딸이다. 재치 있고 귀엽다. 반면에 아들은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것 같다. 나도 아직 가부장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보다.

 

책에는 소소한 일상에서 깨우침을 받는 내용의 글이 많다. 그중에서 꽃수레가 등장하는 글 하나를 골라 보았다.

 

 

앵두와 물고기, 함께 있음의 존재론

 

집에서 물고기 구피를 키우는데, 점싹이라는 새끼 물고기 한 마리가 제법 커서 세 마리를 더 사다 넣었다. 그랬더니 꽃수레는 황점싹, 이등싹, 박납싹, 김흥싹 등등 무슨 고전동화에 나오는 첨지 같은 이름을 붙여서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고 보살폈다. 구피 사총사는 더욱 날랜 몸놀림으로 물속을 유영했고 새끼를 순풍순풍 낳기 시작했다. 어른 네 마리, 새끼 스물여섯 마리. 총 서른 마리로 식구가 늘었다. 이 기적의 드라마. 총연출은 오롯이 꽃수레다.

 

딸아이는 식탁에 잔멸치 볶음이 나오면 두 손을 귀에다가 나팔처럼 모으고 어항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잠시 후, "뭐라고 점싹아? 엄마, 이 멸치는 점싹이의 사촌 형이래"라는 대사를 친다. 백화점 생선 코너에서 고등어를 보면 또 집에 있는 납싹이와 교신을 시도한다. "이 고등어는 20억 년 전 죽은 납싹이 조상이래."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 흥싹이가 배고파 죽겠대. 자기만 먹지 말고 나도 밥 좀 주래" 하고 물고기 밥을 꺼낸다. 이제는 새끼까지 생겨서 일손이 더 분주하고 말이 더 많아졌다. 수시로 어항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그 작은 것들 몸통에서 지느러미가 나오고 꼬리가 생기는 아주 미세한 차이까지 잡아낸다. 핸드폰으로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자랑하고 납싹이의 옆모습, 앞모습, 뒷모습, 위에서 본 모습, 아래에서 본 모습 등 성장과정을 그림으로 남긴다.

 

꽃수레가 재미나게 구피를 키우는 것을 지켜본 딸 친구 한 명이 덥석 어항을 샀다고 했다. 우리 모녀는 그걸 구경하러 갔다가 <토끼전>에 나올 법한 대궐 같은 어항과 수초에 기가 죽어버릴 정도였다. 한 달 후, 친구네 물고기 이십여 마리가 몰살했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우리는 새끼를 또 낳았다고 했더니 그 화려한 어항을 우리 집에 갖다주었다. 이틀을 방치하다가 수레의 등쌀에 못 이겨 납싹이들을 그 큰 어항에 옮기기로 했다. 어항이 커서 바가지로 물을 날랐다. 몇 번 왕복하니 귀찮아서 네 물고기니까 네가 물을 나르라고 떠넘겼다. "알았어, 내가 할 게"하며 흔쾌히 바가지로 물을 나르던 꽃수레. 자기도 힘들었는지 바가지를 들고 쩔쩔매면서 푸념하듯 내뱉는다. "에휴. 납싹이들 죽기 전에 큰 집에서 호강 한번 시켜주려고 했더니 이렇게 힘이 드네!"

 

웬 할머니가 들어앉은 듯 구성진 대사에 나는 웃음보가 터졌다. 큰 집에 살고 싶은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꽃수레는 신바람이 나서 중얼중얼 납싹이와 활발히 교신했다. 나중에 작은 수족관을 운영하거나 작은 동물을 돌보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친정엄마가 화초를 아주 잘 키우셨다. 죽어가던 화초도 살려내던 엄마 덕분에 우리 집은 늘 식물원을 방불케 했고 동네에서도 '화초 잘 되는 집'으로 유명했다. 난 화초도 못 키우고 애완동물고 별로다. 사람 아닌 것에 좀처럼 마음을 주지 못하는 무정한 여인이다.

 

살아있는 존재를 돌보는 그 성가신 일을 즐기는 꽃수레. 딸아니는 2박3일 휴가 가서도 안절부절 납싹이들 다 굶어 죽으면 어떡하느냐고 수시로 근심이 서렸다. 속초에서 회를 먹을 때는 등싹이 증조할아버지의 친구 분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오빠한테 만날 똑같은 레퍼토리 반복하냐, 시시하니 지어내지 말라는 구박을 들어가면서도 꿋꿋하다. 웃을 입은 채 바다에 철퍼덕 앉아서는 납싹이 고향이라 더 아늑하다며 싱긋이 웃는다. 자기가 구피라도 된 양 물 속에서 파도에 밀려갔다 밀려오며 좋아라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좀 '이상한 아이'로 보일지도 모를 대사들을 연신 남발해가면서. 꽃수레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납싹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물고기가 되어 바다에 몸 담글까를 생각한지, 잠시나마 아이 성적을 걱정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자기 삶을 예술로 만드는 방편으로서의 공부라면 아이와 대화하면서 천천히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년이 흘렀다. 꽃수레의 지극한 돌봄으로 구피는 백여 마리로 증식했다. 어항도 두 개로 늘었다. 정말 번식력 왕성한 녀석들이다. 많이씩 태어나고 몇몇이 죽었다. 고만고만한 구피 무리에서 용케도 초기 멤버 네 마리를 찾아 안색을 살피던 꽃수레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파워포인트로 '납싹이가 늙어가고 있다'는 자료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그 녀석들이 어쩐지 생기를 잃어가는 듯도 보였다. 유행가 가사대로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며칠 간격으로 납싹이와 흥싹이는 운명을 달리했다. 딸도 울고 나도 울었다. 모녀가 등 돌리고 앉아서 휴지로 코 풀어가면서 눈물 훔쳤다. 구피의 평균수명이 2년이라 각오는 했지만 막상 죽으니 서운했다. 관행대로 제사를 지내주었다.

 

구피의 첫 제삿날이 떠오른다. 하루는 아주 작은 새끼가 죽자 딸아니는 제사를 지낸다고 수선을 피웠다. 식탁 위에 양초 켜고, 휴지로 싼 시신을 놓고, 물고기 밥을 접시에 소복이 담아 제사상을 차리고는 나더러 백팔 배를 같이 하자고 권했다. 얼떨결에 따라하면서 숨차고 웃기고 찡했다. 모녀의 몸뚱이가 접혔다 펴지면서 거실 바닥이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했다. 오십일 배.... 오십이 배.... 오십삼 배.... 물고기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나는 그 다가옴에 응답한다. 마침내 사유 돋았다. 어항 물갈기가 귀찮다고 물고기 없던 시절로 돌아가길 바랐던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반성했다. 내 안에 사는 것들이 다 사라지면 나라는 개체도 해체되겠구나.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구나 등등. 납싹이 새끼의 사망이 함께-있음의 존재론까지 뻗어가자 푸푹 웃음이 났다.

 

"엄마, 너무 작은 생명이 죽었는데 절하려니까 웃겨?" "아니,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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