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사람이 아니야

샌. 2017. 12. 20. 18:48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사오십 대 때 제일 뜨거웠는데 그 시절에는 한 해에 백 권 정도는 읽었다. 직장에서 벗어난 지금은 자유 시간이 더 많이 나지만 독서량은 줄어들었다.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육칠십 권은 될 것이다.

 

책을 가까이하는 것이 나에게는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여행을 갈 때도 보든 안 보든 책 한 권은 가방에 넣는다. 일행에서 벗어나 몇 장이라도 들춰봐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안중근 의사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힌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런 별스러운 나를 어떤 사람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젠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친구들은 안부를 물을 때  "요즘도 책 많이 보시고?" 라고 묻는다. 요사이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는 반갑다. 그렇게 묻는 친구는 분명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네는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 물어줘야 한다. 서로가 읽은 책에 대해, 또는 작가에 대해 대화할 때가 나로서는 제일 즐겁다.

 

일상의 행복 중의 하나가 동네 도서관에 갈 때다.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날까, 어떤 이야기를 들을까로 가슴이 설렌다. 도서관에는 누구보다 신실한 친구가 재미난 이야기보따리를 안고 기다리고 있다. 서가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보물을 찾은 듯 기쁘다. 배낭에 넣어 돌아오는 길은 온 세상이 다 내 것처럼 부자 마음이 된다.

 

이제는 책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버렸다. 젊었을 때는 책을 사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만족이 되었다. 방의 사방 벽은 책으로 가득했다. 십여 년 전 어느 때 - 무소유의 꿈을 실천하고자 허황된 꿈을 품었을 때 -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책을 방출했다. 애지중지 아꼈는데 미련 없이 내보냈다. 지금은 '감이불취(感而不取)'라는 말이 좋다. 느끼되 취하지 않는다.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미술 작품을 감상하든 마찬가지다. 감응의 파동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면 그 뿐이다. 의식하든 못 하든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많이 알면 자랑할 마음만 생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이 10권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일 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도 상당수가 될 것이다.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거짓말이다. 내 경험으로 보면 바쁘고 고민이 많을 때 오히려 책을 더 찾았다. 자투리 시간을 쪼개서 책을 읽는 데에 독서의 묘미가 있다. 시간이 남을 때 책을 많이 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책을 붙잡고 몇 시간째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아내는 가끔 "사람이 아니야!" 라며 놀린다. 따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핀잔이지만 싫지는 않다. 뭐라고 하든 나는 책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얼마나 쉬운가. 행복이 내 가까이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고, 손만 뻗으면 내 것이 된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인품이 더 향상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내로부터 늘상 듣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은퇴자의 즐거움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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