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불안의 책

샌. 2018. 2. 20. 11:27

오랜만에 묵직한 책을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기분은 많이 가라앉았다. 색깔로 치면 회색의 우울한 감정이었다. 고독, 허무, 몽상, 냉소, 권태, 무기력, 비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이 책을 쓴 페르난두 페소아는 포르투갈 사람으로 신비에 싸인 인물이다.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났고 쓸쓸한 유년기를 보낸 뒤 번역 일을 하며 글을 썼다. 천성적으로 고독했으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많은 글을 썼지만 생전에는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불안의 책>도 페소아가 사망한 지 47년 만인 1982년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불안의 책>은 리스본에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소아르스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다. 소아르스는 곧 페소아 자신이다. 그가 살아간 공간은 사무실과 셋방과 리스본의 거리 뿐으로 좁았다. 사색하고 자신을 분석하며 글 쓰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페소아는 "운명은 내게 단 두 가지를 베풀었다. 회계장부와 꿈꾸는 능력." 라고 말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고독하고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것 같다. 페소아는 자신의 눈으로 삶의 냉정한 관찰자가 되어 일상을 기록한다. 색깔은 좀 다르지만 책에도 몇 번 언급이 되는 라미엘과 비슷한 면이 있다.

 

아마 내가 20대 초반이었다면 페소아의 감정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일기장을 보면 일부는 페소아를 닮은 것도 같다. 반면에 지금의 나는 너무 껍데기 삶을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경박하며 삶을 진지하게 질문하지 않는다. 회의하고 고뇌하지 않는다. 페르소는 내가 외면했던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책은 읽기가 불편하다.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페르소는 냉정하게 세상과 자신을 관찰하며 존재하는 그대로를 기록해 놓았다. <불안의 책>에는 481개의 텍스트가 있다. 그중에는 가슴에 와 닿는 구절도 많다. 한 인간의 내밀한 고백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과 위안을 준다. 제목은 <불안의 책>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가 있다. 삶이 아프고 힘들 때 꺼내보고 싶은 책이다.

 

노트에 옮겨 놓은 몇 대목이다.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 여인숙에 머물며 기다려야만 하니 감옥으로 여길 수도 있겠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사교장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참을성 없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숙을 감옥으로 여기는 건 잠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 안에 누워 있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사교장으로 여기는 건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오는 저쪽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넘긴다. 나는 문가에 앉아 바깥 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나의 크기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네."

 

"우리가 환상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간이 지닌 특징이다."

 

"우리 중 가장 높이 올라간 이는 바로 모든 것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공허한지를 깊은 깨달은 자다."

 

"나는 영혼의 눈이 먼 채로 사막 한가운데 쓸모없이 고립되어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는 꽃의 아름다움을 하는 패배자가 된 편을 선호한다."

 

"인생이 자발적으로 준 것 이상은 인생에 요구하지 않는 자, 해가 있을 때는 해를 쫓아다니고 해가 없을 때는 어디가 됐든 온기를 찾아가는 고양이처럼 본능에 의지해 살아가는 자가 행복한 사람이다. 상상력을 위해 자신의 개성을 포기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관찰하기 좋아하되 모든 감정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다른 이의 감정의 겉모습만을 구경하는 이가 행복한 사람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빼앗길 것도 없고 가진 것이 줄어들 일도 없는 자가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어떤 이념이든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것, 진실을 믿지 않고 진실을 안다는 것의 유용성도 믿지 않으며 초연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늘 사고하며 사는, 내면이 지성적인 자가 갖춰야 할 바른 자세라고 본다. 어딘가에 소속되면 평범해진다. 신념, 이상, 여인, 직업, 이 모든 것이 감옥이고 족쇄다."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있다면, 즉 돈이나 친교, 또는 사랑이나 명예, 호기심 등, 조용히 혼자서 만족시킬 수 없는 욕구들을 해결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찾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자유롭다. 만일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다. 아무리 고귀한 영혼과 정신을 갖고 있다 해도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귀족적인 노예, 지적인 노예일 뿐이고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인생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는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우리의 고통은 우리가 고통스러운 척 꾸밀 때만 심각하고 무겁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있는 그대로 놔둔다면 고통은 올 때처럼 떠나버릴 테고 커질 때처럼 줄어들 것이다.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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