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얼굴 흉터

샌. 2018. 4. 8. 10:35

내 얼굴 왼쪽 눈 옆에는 100원짜리 동전만 한 불그스름한 흉터가 있다. 20년 전 K 고등학교에 근무했을 때 생긴 것이다. 그때는 내 교직 생활 중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다. 안 하던 담임을 맡았는데 아이들과 늘 엇박자였다. 교과목 가르치는 것도 벅찬데 반에서는 연신 사고가 터지고 뒷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나 학부모와 코드가 맞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다. 반대로 그쪽에서는 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K 고등학교는 교사들 사이에 근무 희망 경쟁이 벌어지는 A급 학교였다. 학교 내에서도 서로 담임을 하려고 지저분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눈치가 빨랐으면 애초부터 담임 신청을 말았어야 했다. 한번 해 보지 뭐, 하다가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 학교에서는 건강을 잃은 교사가 여럿 있었다. 암으로 죽은 동료도 있었는데, 우리는 학부모 성화 때문이었다고 믿었다. 1년 넘게 학부모한테 시달리는 걸 보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 쉽게 갈 줄은 몰랐다. 내 몸도 그때 많이 망가졌다. 아침마다 코피는 예사였고, 혈변도 자주 나왔다. 이러다가 병원으로 실려 가는 게 아닌가, 싶은 걱정도 들었다. 제 명대로 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때 얼굴 한 부분이 이유 없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왼쪽 눈 옆이었는데 흉터는 자라나듯 조금씩 넓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대로 뒀는데 나중에는 보기 싫을 정도로까지 커졌다. 다행히 어느 정도까지 커진 뒤에는 멎었다. 아마 해가 바뀌고 나서였을 것이다. 뒤에 생활이 안정된 뒤에 아내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았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피부의 실핏줄이 터졌기 때문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왜 터졌는지 나는 알지요, 라고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더 벌겋게 드러난다. 얼굴에 웬 흉터냐고 가끔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연을 자세히 설명해 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서울의 특수 지역, 그곳에 살던 인간에 대한 환멸은 다시 기억해 내기 싫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걸 그때 똑똑히 목격했다.

 

칠팔 년 전쯤인가, 같은 마을에서 컸던 초등학교 동기를 만났다. 거의 40년 만이었다. 그 친구가 내 얼굴 흉터를 보더니 대뜸 옛 추억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뱀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자동으로 돌을 집어 들고 던졌다. 꽤 큰 뱀이었는데 도망을 가려 했지만 돌 세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죽은 걸 확인하고도 돌 던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던진 돌에 찢어진 뱀 살덩이가 내 얼굴에 와서 붙었다. 기겁할 일이었다.

 

워낙 놀라서 지금도 뇌리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그런데 40년 만에 만난 친구도 같은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너 그때 뱀 죽인 벌을 받았는가 보다." 얼굴 흉터가 뱀의 독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하필 왜 나란 말인가. 그때 나는 돌멩이 하나 제대로 던지는 못하는 소심한 아이였다. 옆에 서 있었던 죄밖에 없었다. 정확히 하자면 제일 치명상을 가한 친구 얼굴로 복수의 토막이 날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왜 나냐고,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친구의 말을 들은 뒤부터 흉터의 원인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 얼굴 흉터는 초등학생 때 생긴 거였어. 잠재되어 있다가 늦게 나타났을 뿐이야. 지금도 뱀 살이 들러붙던 차갑고도 축축한 느낌이 떠오른다. 그것 역시 유쾌한 기억은 못 되지만 그래도 K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보다는 낫다. 인간에게는 기억 미화 메커니즘이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이 대부분 아름답게 저장되어 있는 걸 보면 안다. 그래서 아픔도 따뜻한 상처로 변해 간다. 무심코 말 한 옛 친구의 한 마디가 나에게는 큰 위무가 되었다. 그 뒤부터 학교에 대한 악몽을 덜 꾸게 된 것도 친구 덕분이라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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