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 신동호

샌. 2022. 8. 3. 09:51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면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 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 김주대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킥킥
그 고운 눈매를 떠올리다 보면 진보, 보수 잘 모르겠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그 일도양단이 참 대단하고 신기하다.
주대가 좋아하는 큰 엉덩이에도 진보와 보수가 있을까? 싶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나는 존다.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술 먹자는 전화가 온다.
열 중 아홉은 진보적인 친구들이고 하나는 그냥 친구다.
보수적인 친구가 나에겐 없구나, 생각한다.

오후 여덟 시 나는 대부분 나쁜 남자다.
가끔은 세상을 다 바꿔놓을 듯 떠든다.
후배들은 들은 얘길 또 들으면서도 마냥 웃어준다.
집에 갈 시간을 자주 잊는다.

오후 열한 시 무렵이 되면 나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다.
어느새 민주주의와 역사적 책무를 잊는다.
번번이 실패하지만 돈을 벌고 싶고, 일탈을 꿈꾼다.

자정이 다가오자 세상은 고요하다.
개구리는 진보적으로 울어대고 뻐꾸기는 보수적으로 우짖는다.
뭐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사상보다 삶이 먼저라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진보적일지 몰라, 하면서
대충 잔다.

-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 신동호


사람을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것만큼 애매한 것도 없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개념도 사람마다 다르다. 진보-중도-보수의 스펙트럼에서 내 위치는 왔다리갔다리 한다. 주로 진보 쪽에 있다고 믿지만 하는 짓을 보면 머릿속에 보수적 사고방식이 박혀 있는 것 같다. 삶이 바탕하지 않는 개념은 헛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의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지도 의문이다. 두 정당 모두 보수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는 약간 진보적 색채를 띄고 있고, 다른 하나는 수구적 경향이 강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두 정당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이용해 먹는다는 것이다. 한쪽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그 짓을 하고 있고, 다른 쪽은 안 그런 척하지만 도찐개찐이다.

신동호 시인은 문재인 정부 때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시에서는 진보적 삶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가 읽힌다. 사실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보다 자신의 가치를 얼마나 삶으로 살아내느냐에 있는지 모른다. 진보든 보수든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족속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엉터리 진보 보수들이 똥파리처럼 들끓어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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