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포츠 중에서 PBA에서 주관하는 프로 당구 시합 중계를 즐겨 본다. 올해 PBA 2차 투어가 지난주에 안산에서 열렸는데, 대회 마지막 날 남자 결승전이 끝나고 해프닝이 있었다. 여자 우승자인 스롱 피아비(캄보디아)와 남자 우승자인 쿠드롱(벨기에)이 같이 기념사진을 찍을 때였다.
스롱이 가까이 해서 찍자고 신호를 보내니 쿠드롱이 고개를 젓는 게 화면에 보였다. 머쓱해진 스롱도 다가섰다가 반 발짝 정도 떨어졌다. 서로 미소는 지었지만 어색한 장면이었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스롱이 지인에게 불만을 털어놓았고, 화가 난 지인이 쿠드롱에게 가서 인종차별이 아니냐고 항의를 했다. 쿠드롱은 기자회견도 하지 않고 돌아가버렸다. 며칠 지나 PBA에서는 두 선수에게 주의를 주고, 물의를 일으킨 지인은 시합장 영구 출입 금지 조치를 했다.
이 해프닝을 보면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쿠드롱이 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스롱과 가까이서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쿠드롱의 평소 인품으로 볼 때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여성에 대한 존중심 때문이라고 뒤에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회의 남녀부 우승자니까 서로 악수도 하고 축하하는 말이라도 나누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쿠드롱은 스롱이 다가올 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화면에 잡힌 걸로는 그랬다. 아마도 둘의 오해는 문화 차이 탓이 클 것이다.
위선(僞善)의 사전적 풀이는 '겉으로만 착한 체 함'이다. 우리는 위선을 나쁜 죄악으로 받아들이지만, 때로는 위선이 필요할 때도 있다. 각자의 위선 탓에 사회가 이 정도로나마 굴러가는 게 아닐까.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아마 많은 인간관계가 파탄날 것이다. 쿠드롱의 내심은 모르지만 혹 스롱과 거리를 두려는 마음이 있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공식적인 자리니까 비록 위선일지라도 웃으며 환영했다면 분위기가 훈훈했을 것이다.
딴 얘기지만 벨기에에는 나쁜 인상이 남아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저지른 대규모 인종 학살이다. 무려 1천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고무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팔을 차례로 자르고 나중에는 목을 베었다. 인종 차별이 아니라 아예 콩고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지금도 유럽에서 인종 차별이 제일 심한 나라가 벨기에라고 한다. 드러내지 않을 뿐 인종간의 갈등은 어디에나 잠복되어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 시위도 인종 차별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되었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 무의식에는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며 누적된 피해 의식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백인의 우월 의식 역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소한 계기만 생기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인종 차별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뭇매를 맞을 것이다. 내심이 어떻든 누구나 모든 인종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위선이 일종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탓이다. 그런 면에서 위선을 긍정한다. '~인 척' 또는 '~ 아닌 척' 하는 작은 위선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도 한다. 많은 사람을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사악한 위선은 제외하고 말이다. 이번 당구 해프닝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