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공산토월

샌. 2023. 8. 17. 11:12

문학동네에서 나온 이문구 작가의 대표 중단편을 모은 책이다. 연작소설인 '관촌수필'에서 네 편, '우리동네'에서 두 편, '유자소전' 등 기타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의 대표작인 '관촌수필(冠村隨筆)'은 두 번째 읽어보는데 마음 밑바닥을 흔드는 감동은 처음과 같았다. 작가의 자전소설인만큼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그 시절의 현장에 함께 있는 듯했다. 이 책에는 네 편이 담겨있는데 '일락서산(日落西山)'에는 작가의 할아버지, '행운유수(行雲流水)'에는 옹점이, '녹수청산(綠水靑山)'에는 대복이, '공산토월(空山吐月)'에는 신석공이 나온다.

 

다시 읽어봐도 제일 끌리는 인물은 역시 '행운유수'의 옹점이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옹점이를 만났다. 작가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열 살 위의 소녀 옹점이는 친구이자 든든한 보호자였다. 부엌 허드렛일을 하지만 옹점이는 당차고 올곧았다. 작가는 옹점이를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주체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해방 후 들어오 미군이 지나가면서 먹던 과자나 초콜릿을 던져주면 마을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환장을 했다. 그럴 때 옹점이는 어린 작가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그것들이 조선 사람은 죄다 그지라구 여북이나 숭보면서 비웃었겄네. 개헌티두 그렇게는 안 던져주겄더라. 너는 누가 주더라두 받어먹지 말으야 여."

"대관절 조선 사람이 뭘루 뵜글래 쳐먹던 것을 던져줬으까나."

옹점이를 보면서 그 시절 우리 누이들의 삶을 생각한다. 험한 시절의 기구한 인생살이를 피할 수 없었던 건 옹점이도 마찬가지였다. 장터에서 약장수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옹점이를 보자 작가는 울며 달아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이 책의 표제작인 '공산토월'의 주인공은 신석공인데 해방 후 이념 갈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기 희생의 표상 같은 신석공 역시 한과 눈물의 삶을 살아야 했다. 소설 끝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신석공이 남긴 말이 가슴을 판다.

"잘들 사는 걸 보구 죽으야 옳을 텐디, 이대루 죽어서 미안하네... 부디 잘들 살어..."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작가와 함께 우리 모두에게 주는 당부가 아닌가 싶다. 내 살아가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조심스럽게 돌아본다. 

 

이문구 작가가 그린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깊은 속정과 도리를 갖고 있다. 우직하면서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선을 앞세운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얄팍한 인간성의 현대인과 대비된다. 자연스레 소설에서는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의 정조가 깔려 있다. 작가가 '관촌수필'을 쓸 때가 1970년대였는데 지금 세태는 오죽 더하랴 싶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본인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물을 그려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진국스럽고 도탑고 진득하고 의리 있고 촌스럽고 무디고 허접하고 시속에 따르지 않고 뻗대고 의뭉스럽고' - 여기에는 작가 자신의 모습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문구적인 인물이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에 서는 것, 대의에 따르면서도 생색내지 않고,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선두가 아니라 중간쯤에 서서 그로 인해 생기는 이익을 자기 몫으로 챙기지 않는 것, 그럼에도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보다 아래로 두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설에서는 충청도 사투리가 날것 그대로 쓰이고 생소한 단어가 등장해서 대충 의미를 짐작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문구 작가의 글은 묵직하면서 토속적이다. 젊은이가 읽기에는 상당히 어려움을 느낄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는 문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문구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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