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도피하는 독서

샌. 2023. 8. 19. 12:54

손주에게 새겨진 내 이미지는 책이다. '책 읽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저희들끼리 통한다. 책'만' 본다고 할 때는 자기들과 안 놀아준다고 불만이 있을 때다. 사실 그렇다.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이 귀찮을 때 나는 책으로 도피한다. 방에 들어왔다가도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나간다.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볼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라는 게 불문율이 되어 있다. 손주나 아내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핀잔을 받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침범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나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때는 세상을 떠나 온전히 나에게로 도피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보통의 내 또래에 비하면 그렇다. 일년에 대략 70권 안팎을 읽는다. 과거에 많이 읽을 때는 한 해에 백 권을 넘게 읽었다. 이만하면 다독이라 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의 가장 가까운 벗은 책이다. 책만큼 다정하면서 신실한 친구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 친구는 내가 불러만 주면 알라딘의 요술 램프가 되어 나타난다. 온갖 재미있는 얘기를 속삭여주며 내 넋두리도 진지하게 들어준다. 사람 친구는 이것저것 신경을 쓰고 눈치를 봐야 하지만, 책 친구를 만나는 건 그렇지 않다. 하물며 책 속에는 시공간을 초월한 무수한 친구와 이야기들이 대기하고 있다. 

 

세상사가 짜증나고 버거울 때 나는 가까운 책으로 도피한다. 사람마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한 실용적인 필요도 있겠고, 삶의 지혜나 위안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한 소일거리이거나 흥미 위주의 독서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이런 모든 것의 바탕에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이나 사람들과 서걱거리다 보니 책의 세계로 숨어드는 게 아닌가 싶다. 그곳은 고독하면서 따스한 나만의 동굴이다.

 

'도피'가 부정적인 의미만 가진 것은 아니다. 경제적 효율성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가치도 많다. 이 세계는 무용(無用)이 있기에 용(用)이 가능하도록 짜여 있다. 나에게는 책으로의 도피도 마찬가지다. 책 친구는 현실을 살아갈 힘과 에너지를 준다. 네가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다독여준다. 그런 점에서 동굴은 숨는 곳이 아니라 신발끈을 동여매고 다시 일어날 다짐을 하는 곳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라는 안중근 의사의 글씨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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