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사임당

샌. 2023. 12. 23. 13:54

'현모양처 신화를 벗기고 다시 읽는 16세기 조선 소녀 이야기'라는 부제에 끌렸다. 우리가 교육받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서의 사임당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니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권력이 원하는 여성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필요로 순종과 희생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세뇌 과정의 일부였다. 가부장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는 '열녀효부(烈女孝婦)'라는 말로 여성성을 억압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층이 요구하는 인간상이 있기 마련이다.

 

당대나 직후에 사임당은 '여성화가 신씨'로 불렸다.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송시열에 의해 '율곡의 어머니'로 존경하기 시작했다. 율곡을 대성현으로 모시게 되니 자연스레 율곡을 기른 어머니의 모성성을 숭앙하게 된 것이다. 사임당은 20세기에 들어서 현모양처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 초반은 고려의 풍습이 남아 있어 남녀가 평등했다. 유산은 아들 딸 구별 없이 상속되었고, 제사도 딸이 주관하여 지낼 수 있었다. 16세기까지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혼인제는 남귀여가제(男歸女家制)였다. 남귀여가제란 혼례를 치른 첫날 저녁에 신랑이 처가로 가서 자고 사흘째 되는 날 부부가 상견례를 한 다음 처가에서 혼인생활을 시작하는 것, 말하자면 처가살이다. '장가(丈家)'란 장인, 장모의 집이라는 뜻이니 '장가간다'는 말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시집살이'는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 중반 이후에 정착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임당의 경우도 혼인 초기부터 오랫동안 친정살이를 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임당은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학문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자신이 살아가야 할 뜻을 세우고 군자가 되길 염원했던 것 같다. 호인 사임당(師任堂)의 '사(師)'는 본받는다는 뜻이고, '임(任)'은 고대 중국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뜻한다. 태임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박식하고 현명하고 엄격하며 의롭고 자애로움을 갖춘 여성으로 추앙되는 인물이었다. 사임당이 지향했던 것은 태임과 같은 군자됨이었다. 사임당은 오늘날 생각하듯이 현모양처라는 봉건적 질서에 순응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기완성, 즉 군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불린 여성이 여럿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신사임당을 비롯해 장계향(張桂香, 1598~1680),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 등이다. 성리학자인 남성들의 시각이겠지만 남존여비의 숨 막힐 듯한 조선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의 여성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기록되지 않은 다른 여성도 많을 것이다.

 

사임당은 난설헌과 자주 비교된다. 둘 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강릉 출신이며, 좋은 집안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불행한 결혼 생활도 닮았다. 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나 난설헌의 남편인 김성립은 총명한 아내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조선 시대 기준으로는 평범한 남편이었는지 몰라도 예술적 감성을 가진 둘은 내면의 상처가 컸다. 어린 시절과 친정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두 사람의 작품에 진하게 녹아 있다. 무거운 짐을 감당 못한 난설헌은 20대에 요절을 했다.

 

사임당은 유교 전통의 사회에서 가족주의의 틀에 갇히지 않은 주체적 지성인이었다. 일곱 남매들이 출세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완성의 길을 가길 바랬다. 단순히 현모양처의 이미지에 갇힐 여성이 아니다. 그녀의 일생은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남편의 외도로 평생 가슴이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고통을 안고 살았다. 난설헌처럼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음을 한탄하지 않았을까. 특히 학문이 뛰어난 조선의 여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펼칠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한편으로 사임당은 자신의 재능을 물려받은 자식들을 보며 보람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임해리 선생이 쓴 <사임당>을 읽으면서 사임당을 '현모양처'나 '율곡의 어머니'의 틀에 가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종속적이고 자유롭지 못했던 유교 전통사회에서 사임당이 이루어낸 인간적인 성취와 주체성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정이나 사회에 어떤 역할을 했느냐의 잣대보다 한 인간의 내적 성장 관점에서 사임당을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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