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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어휘력

"언어는 나다.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책을 읽다가 순간 멎어버린 강렬한 인상의 문장이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인식한다면 어휘력이야말로 우리가 보는 세상의 넓이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속 생각을 드러낼 어휘가 부족하다면 세상과의 소통에 그만큼 장애를 겪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힘과 시각을 기르는 일이다. 지은이인 유선경 작가는 에서 책 읽기, 글쓰기, 말하기, 공감, 소통과 관련한 어휘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랫동안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작가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소개한다. 주석에는 보석 같은 예쁜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메모해 두었다가 언젠가는 써먹어 보고 싶은 말들이다. "나는 한갓진 게 좋고, 잠포록한 날씨를 좋..

읽고본느낌 2024.04.07

바람의 집 /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 바람의 집 / 이종형 어제가 제주 4.3 사건 76주년이었다. TV로 추념식을 보며 이념 갈등으로 벌어진 우리 현대사의 ..

시읽는기쁨 2024.04.04

예봉산의 봄맞이

다시 찾아온 봄을 맞으러 예봉산에 들었다. 계곡의 노루귀가 제일 궁금했고, 다른 꽃들과도 눈맞춤할 생각에 들떴다. 지난 가을 이후 산행은 다섯 달만이다. 예봉산은 높이가 683m지만 능선의 경사가 급해 만만찮은 산이다. 이번에는 계곡을 타고 올라가서 능선을 따라 내려오기로 한다. 산은 진달래가 한창이고 초입에는 제비꽃을 비롯해 많은 야생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꽃들을 구경하면서 느릿느릿 정상에 올랐다. 등산객이 놓아준 먹이에 곤줄박이는 신이 났다.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먹이를 물고 날아갔다가 눈치를 봐서 다시 오기를 반복했다. 새로서는 엄청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나마 곤줄박이니까 가능하지 다른 새들은 감히 접근을 못한다. 예봉산 정상은 조망이 좋다. 북서 방향으로는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멀리 ..

사진속일상 2024.04.03

떨림과 울림

과학 도서가 초판 30쇄를 했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 놀라웠다. 이마저 2022년 기준이니 지금은 더 올라갔을 것이다. 은 물리학의 기초 이론을 설명하지만 내용이 쉽지만은 않고 상당히 철학적인 책이다. 인기 요인 중에는 지은이인 김상욱 선생의 유명세 덕분도 있을 것이다. 은 우주에서 시작하여 힘과 에너지, 시공간에 대한 해석, 엔트로피와 양자역학 등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물리학의 틀과 이론을 보여준다. 기존의 과학서적과는 다른 접근법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리 이론이 세상의 구조를 밝히는 걸 넘어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연결될 때 물리학은 따스한 학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상욱 선생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원자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읽고본느낌 2024.04.01

뒷산 진달래(2024)

뒷산에도 진달래가 활짝 폈다. 진달래가 폈다는 것은 봄이 곁에까지 다가왔다는 신호다. 매화나 산수유가 봄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체감할 정도는 아니고, 진달래가 펴야 제대로 봄이 온 것 같다. 이제 다음 차례은 벚꽃이다. 벚꽃이 만개하면 농익은 봄이 기다린다. 햇살 좋은 일요일 오전에 진달래를 감상하며 뒷산길을 걸었다. 이른 봄철 뒷산에는 산길을 따라 진달래가 곱게 핀다. 아직 산은 겨울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분홍색 진달래는 나무들에게 어서 빨리 잠에서 깨어나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진달래를 보면 철없이 뛰놀던 소년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때 고향 뒷산에도 봄이 찾아오면 진달래가 피어났다. 온 산을 돌아다니다가 허기가 지면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다시 내달렸다. 진달래 앞에서 셀카를 찍었다. 이런 게 둔갑술..

꽃들의향기 2024.03.31

사기[16]

평원군이 말했다. "대체로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 같아서 그 끝이 금세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 지금 선생은 내 문하에 3년이나 있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나도 선생에 대해 들은 적이 없소. 이것은 선생에게 이렇다 할 재능이 없다는 뜻이오. 선생은 같이 갈 수 없으니 남아 있으시오." 모수가 말했다. "저는 오늘에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를 좀더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그 끝만 드러나 보이는 게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밖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 사기(史記) 16,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진나라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 왕은 평원군을 초나라로 보내 합종을 맺고..

삶의나침반 2024.03.30

동네 매화

우리 동네 매화꽃이 피기 시작했다. 남녘 매화 축제는 보름 전에 열렸지만, 여기는 이제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있다. 이곳까지 찾아와 준 봄이 기특하고 고맙다. 동네에서 만나는 매화는 아파트 단지 안에 조경수로 심은 것이다. 백매가 제일 많고 홍매와 청매가 한 그루씩 있다. 그중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홍매다. 수줍은 듯 발갛게 물든 색깔이 곱다. 올해 각 지자체에서 벚꽃 축제를 잡았지만 꽃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요사이 흐리고 비 오는 날이 계속되어 벚꽃 개화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지자체에서는 벚꽃 축제를 일주일 연기하면서 이런 사죄 문구를 올렸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하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제 열흘 뒤면 총선이다. 집권당의 답답함도 같은 심정이지 않을까 싶다. "죽을죄를 졌습..

꽃들의향기 2024.03.29

축소되는 세계

2050년이 되면 세계 경제 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2070년이 되면 세계 인구가 감소하는 변곡점에 도달한다. 거기에 기후 변화, 기술 발전, 정치 불안정 등의 요소가 더해진다. 가장 중요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현상일 것이다. 미국의 도시 계획 전문가인 앨런 말라흐가 쓴 는 줄어드는 인구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한 책이다. 도시 전문가여서 그런지 '축소도시' 문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설명한다. 이 책을 본 것은 우리의 근미래가 궁금해서였다. 인구 감소는 이미 어쩔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2020년부터 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시차가 있을 뿐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로 인한 주..

읽고본느낌 2024.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