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샌. 2004. 6. 29. 14:18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

 

사람들 틈에서 살지만 사람이 그립다.

대낮에 아테네 거리에서 등불을 들고 다니며 참된 사람을 찾았다는 디오게네스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한다.

사람들 수첩에는 지인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고, 두꺼운 명함첩엔 이름과 직함이 가득하다해도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진실된 마음의 벗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다.

대부분은 '나와 그것'의 관계로 우리는 그저 필요에 의해 만났다가는 스쳐 지나간다. 속나까지 적셔드는 그런 관계란 드물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지기(知己), 또는 지음(知音)이라고 한다. 지기란 나를 나 이상으로 속속들이 알고 이해하는 친구가 아닐까 싶다.지음도 마찬가지 뜻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오직 한 사람이 들어주었다. 나아가음(音)이 거문고 소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마음의 소리 또는 영혼의 울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말하는 '그 사람'이란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존재의 동반자로 읽혀진다. 거칠고 외로운 세상길에서 힘을 주고위로를 주는 동반자이다. 그런즉 도반(道伴)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런 친구를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이다. 친구를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다. 이런 친구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

옛 사람도 이런 심정이야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우정도 이렇게 절절한 그리움으로 가득할 수 있음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 간 뽕나무를 심고, 1년 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 이덕무(李德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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