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위기십결

샌. 2013. 1. 15. 09:31

바둑은 선택이다. 바둑 한 판 두자면 백 개가 넘는 돌을 놓아야 하는데 그만큼의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는 말과 같다. 오직 이 한 수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여러 개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그 선택이 상대의 수와 어울려 한 판의 바둑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바둑은 선택과 조화다.

 

바둑을 둬보면 우리네 인생살이와 닮았다는 걸 느낀다. 인생길에서도 수많은 갈림길에 선다. 이 길을 갈까, 저 길을 갈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한 길을 선택한다. 한참 지나서 보면 다른 길이 훨씬 나았음을 알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른 선택하고 후회와 자책을 거듭하며 종착지에 이른다.

 

좋은 바둑을 두기 위해 지침으로 삼는 게 위기십결(圍棋十訣)이다. 바둑의 십계명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때 현종의 기대조였던 왕적신(王積薪)이 만들었다고 한다. 기대조(棋待詔)는 임금의 바둑 상대가 되는 벼슬의 일종이다. 궁중에는 별난 직책도 다 있었다. 이 위기십결은 바둑만이 아니라 인생의 지침서도 된다.

 

1.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에 집착하면 이기지 못한다.

 

2. 입계의완(入界誼緩), 경계를 넘어들어갈 때는 천천히 행동하라.

 

3. 공피고아(功彼顧我),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라.

 

4. 기자쟁선(棄子爭先), 돌 몇 점을 희생시키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5. 사소취대(捨小就大), 작은 곳을 버리고 큰 곳으로 나아가라.

 

6. 봉위수기(逢危須棄), 위험을 만나면 모름지기 돌을 버려라.

 

7. 신물경속(愼勿輕速), 신중하게 움직이고 경솔하지 말라.

 

8. 동수상응(動須相應), 돌의 기능이 서로 살도록 착수하라.

 

9. 피강자보(彼强自保), 상대가 강하면 먼저 자신을 지켜라.

 

10. 세고취화(勢孤取和), 세력이 약하면 화평을 취하라.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다. 기원에는 꼭 위기십결이 벽에 걸려 있다. 하지만 바둑을 두다 보면 금방 잊어버린다. 왜냐하면 이기려는 욕심 때문이다. 그래서 위기십결의 맨 처음이 부득탐승(不得貪勝)인지 모른다. 이 망령 때문에 판을 망친 게 부지기수다. 너무 힘이 들어가면 사리판단이 안 된다. 다른 스포츠 종목이나 인생도 마찬가지다. 탐승(貪勝)은 제 스스로 만든 걸림돌이다.

 

이젠 바둑을 두면서 승부보다는 즐기려고 노력한다. 이기고 진 결과보다는 마음에 든 바둑을 둔 게 훨씬 보람이 있다. 이겨도 마음이 찝찝할 때가 있고, 져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수가 부족하거나 못 봐서 지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승리에 집착하다가 무리수를 두게 되고 더 큰 화를 입게 되면 속이 상한다. 혹 상대의 실수로 이기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지는 게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아무도 즐기는 자를 당하지는 못한다. '이기려면 버려라!', 이것이 바둑과 인생의 핵심인 걸 알겠다. 어제 서울에 나가 바둑을 두면서 느낀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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