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교육과 경쟁

샌. 2013. 1. 27. 08:40

- 학교 다니면서 경쟁(competition)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나요?


"네. 체육시간, 특히 100m 달리기 할 때요. 그 외에는 들은 적이 없어요. 예를 들어, 영어를 두고 학생들이 어떻게 경쟁을 할 수 있죠? 궁금하네요."


- 시험(test)을 쳐서 성적(grade)을 매겨 등수(ranking)를 내어 경쟁의 우위를 선별하지요. 핀란드에서는 시험을 치지 않습니까?


"시험은 치는데 성적은 매기지 않습니다. 등수라고 하셨나요? 등수가 뭔가요?"


- 네? 등수 모르세요? 시험 성적에 따라 1등, 2등, 3등, 꼴찌를 가리는 것 말입니다.


"학교가 시험을 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등수는 왜 가리나요? 시험을 치는 이유는 학생이 해당 과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잖아요? 예를 들어, 수학 시험을 보았다고 합시다. 시험 결과가 곱셈은 잘 하는데 나눗셈은 못한다고 나왔다면 나눗셈을 잘 할 수 있도로 어떻게 돕느냐가 선생님과 그 학생의 과제가 되겠죠. 그래서 다음 날부터는 선생님과 친구들은 그 학생의 나눗셈 실력 향상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지요."


- 성적표는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받아보기는 커녕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의 시험 결과를 개인적으로 상담해서 알려줍니다. 일대일로 만나서 개별 상담을 해주는 것이죠. '너는 수학에서 확률은 잘 하는데, 미적분은 못하더라. 미적분을 잘 하려면 이렇게 하면 좋을 거야. 그리고 과학에서는 생물은 잘하는데, 화학은 못하더라. 화학은 이렇게 하면 좋을 거 같구나.' 뭐 이런 식이죠. 학생 스스로 하는 자기 평가라는 의미에서 성적표가 있을지는 몰라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는 내용의 성적표는 없습니다. 특히 '누구 몇 등' 그런 식은 있을 수 없죠."


- 왜 등수를 표시한 성적표가 있을 수 없죠?


"교육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지, 친구와 비교해 우열을 가리는 경쟁은 아니니까요. 학생들을 서로 비교해 서열을 매기는 것은 올바른 교육이 아니지 않나요. 그래가지고 친구들끼리 협동심이나 우정이 제대로 생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못하지만 내일을 잘 할 수도 있고, 수학은 못하지만 언어는 잘 할 수 있는 건데, 그걸 몇 번의 시험으로 우열을 매기는 게 학생 개개인에게나 사회 전체에나 무슨 도움이 되나요? 학교의 목표가 아이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라 할 때, 시험 결과를 등수로 매겨 성적표를 공개하는 것은 아이들의 기를 애초부터 꺾어놓는 최악의 교육 형태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인이 묻고 핀란드인이 답하는 이 대화는 언젠가 인터넷 매체에 소개된 것이다. "영어를 두고 학생들이 어떻게 경쟁을 할 수 있죠?"라는 반문은 일찍부터 경쟁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전부터 우리 교육 시스템에 대해 회의를 했던 터라 경쟁이 아니라 협동하는 공부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게 경쟁과 불안이다. 지배층은 경쟁과 불안 심리를 이용해 국민을 통제한다. 그들은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말한다. 경쟁이 있어야 최선을 다해 일하고 발전이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일하느냐고 묻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다. 인간의 허황된 욕망을 부추기면서 경쟁으로 몰아넣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인 사회다.


그런 경쟁 시스템에 인간을 길들이는 것 중의 하나가 학교다. 나도 그런 교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컸다. 교단에서도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회의가 찾아왔다. 이건 아닌데, 라는 갈등이 생겼고 분필을 잡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그렇다고 내 소신을 펼칠 용기도 없었다. 황폐해지는 교실을 보는 건 너무 슬펐다. 도중하차를 한 제일 큰 이유였다.


핀란드는 되는데 왜 우리나라는 안되는 걸까? 인간 세상에 경쟁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데 우리 사회의 문제가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무슨 대단한 것을 얻겠다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서기시키니 낙오한 아이들은 아예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학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작은 한 부분이다. 다양한 재질을 꽃 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기는 법이 아니라 협동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남을 제치고 이겨야 살아남는다면 교실이 행복할 수가 없다. 인식이 변하고 체제가 변하면 세상은 훨씬 따스해질 수 있다.


지금도 교직에 남아 있는 친구로부터 학교 현장 얘기를 듣는다. 아이들이 무기력하고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생명이 원래 그런 것 아니다. 더구나 한창 생기발랄할 나이가 아닌가. 온종일 교실에 가둬놓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교과서 공부를 시키니 그럴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등학교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의 주지과목 중심이다. 야생의 꽃을 화분에 옮겨 놓고 아무리 수돗물을 준들 시드는 건 당연하다. 많은 아이들이 비인간적인 교육 제도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학교 교육보다 더 문제 되는 것은 가정이다. 일 중심, 돈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부모의 가치관이 달라져야 한다. 스웨덴에서 살았던 어느 분이 한국에 와서 제일 이상했던 게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스웨덴에서는 일 년에 며칠을 제외하고는 온 가족이 늘 저녁 식탁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하루에 있었던 일이 얘기되고 가족간에 소통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는 지나친 간섭이거나 방임이다. 가정이 건강해야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 가정이 바로 서면 학교 교육도 자연히 바로 된다.


우리 교육 정말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뿌리가 병들었는데 학교 교육만 따로 떼어놓고 처방전을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국민 의식과 함께 사회가 같이 변해야 한다. 정부, 가정, 학교가 마음을 모아 바른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죽은 지식을 암기시키고 평가를 해서 줄 세우는 사람 잡는 짓은 그쳐야 한다. 첫째가 사람 중심이다. 그를 위해 우선 당장은 지나친 경쟁을 완화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이 있었으면 한다. 오로지 대학에만 초점이 모여 있는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스웨덴에 갔던 그분은 한국에서 받았던 교육을 돌아보며 한스러웠다고 말했다. 같은 사람 사는 곳인데 나라마다 이렇게 차이가 난다. 경쟁하고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는 걸 그쪽에서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경쟁을 못 시켜 안달일까? 미래의 행복을 담보로 지금 바로 경쟁과 성공의 사닥다리 싸움에 동참하라고 부추기는 거짓 교사들이 수두룩하다. 경쟁에만 내몰린 아이가 남을 배려하거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는 없다.


경쟁에 대해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생존경쟁'이란 것, 다 거짓입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역사는 하나입니다. 서로 다투고 싸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붙듦으로 살아갑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힘의 숭배자들입니다.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루어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힘센 자들은 저만 살려고 그런 제도를 만들었고, 그런 제도를 영원히 민중 위에 씌워두려고 그런 철학을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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