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늙을수록 사람들 속에서

샌. 2013. 5. 26. 08:43

오래전부터 내 꿈은 사람들과 세상에서 벗어나 적막강산에 들어가 사는 것이었다. 모든 욕심 내려놓고 산과 나무와 풀로만 친구하며 살고 싶었다. 사람 소리가 절절히 그리워지도록 철저히 홀로이고 싶었고 외로워지고 싶었다. 나름대로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인간에게 너무 부대낀 게 원인이었지만 그것 역시 내 천성이 그러한 탓이었다.

 

퇴직을 하고 광주로 내려와서는 인간과의 마찰은 거의 사라졌다. 여기가 산골 초막은 아니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강원도 심심산골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아침이면 새 소리가 잠을 깨우고, 봄이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진동한다. 창문을 열면 맑은 공기에 풋풋한 시골 냄새가 풍긴다. 종일 있어도 사람 하나 만나지 않고 지나는 날이 많다.

 

그러다 보니 적막강산에 대한 꿈도 많이 시들해졌다. 굳이 파라다이스를 찾아 은둔할 필요성이 줄어든 것이다. 이젠 오히려 늙을수록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상식적 생각에 동의하게도 되었다. 전에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하며 속으로 욕을 했다. 병원도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 뭣 할래, 라며 쯧쯧 혀를 찼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이젠 장담을 못 한다. 나 역시 하나의 인간일 뿐, 특별난 놈이 아니란 걸 깨달아가고 있다. 나는 내가 남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고독을 향유하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 또한 그저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다. 더구나 힘 빠지고 늙을수록 선택의 여지가 점점 좁아진다. 도움받을 일만 점점 늘어난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활기차게 사시는 건 주변에 친구와 이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적 관계망이 없다면 어머니의 노년은 훨씬 쓸쓸했을 것이다.

 

집 앞에 태권도장이 있다. 여름에 창문을 열어야 할 때면 도장에서 들리는 기합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 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병아리 같은 유치원생들의 기합 소리가 귀엽게 들릴 때도 있지만 사범의 고함만은 여전히 질색이다. 아주 외로운 사람이 있다고 치자. 사람의 소리가 그립다면, 보고 싶은 손주를 만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저 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얼마나 반가울까? 새벽부터 창문을 열어놓고 기다릴지 모른다. 너무 싫어하거나 반길 절대적 가치 같은 건 없다. 적막강산에 대한 꿈은 저 소리와 같은 것이다.

 

사랑한다는 건 사랑한다고 여기는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내가 가졌던 꿈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꿈 자체였는지 모른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도피 욕구를 키우고 은둔이라는 꿈으로 형상화된 게 아닐까. 인간은 꿈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다. 적막강산이 사그라지면 또 다른 물건이 그 자리를 탐하려 덤빌 것이다.

 

늙을수록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데 부분 동의한다. 행복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믿는다. 그래도 '부분'을 강조한 건 '홀로'의 가치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천하에 당당히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세상과 또는 이웃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리라 믿는다. '홀로'와 '함께'는 노년을 살아가는 불가분의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전에는 '함께'는 무시하고 '홀로'만 쫓았다.

 

이곳 광주로 올 때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만족한다. 도시와 시골의 중간지대로서 매력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내 집'은 아니다. 언젠가는 아파트를 벗어나 마당이 있는 집으로 옮기게 될 것이다. 아마 광주보다는 더 시골로 들어간 곳, 그렇다고 적막강산은 아니고 서울과 가까운 수도권 어디쯤 될 것 같다. 자식들도 손주 데리고 오가기 편한 곳,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내 생각도 많이 변하고 있다. 각이 점점 깎여지고 두루뭉술해진다. 앞으로 사는 모양새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다만 이웃은 필요 없고 나 혼자서 잘할 수 있다는 큰소리는 더는 치지 못 할 것 같다. 미우나 고우나 사람들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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