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호박 목걸이

샌. 2014. 5. 7. 09:58

딜쿠샤(Dilkusha)를 처음 본 건 문화 답사 모임을 따라갔던 6년 전이었다. 굉장히 오래되고 낡은 서양식 건물이었는데 그때는 딜쿠샤보다도 옆에 있던 큰 은행나무에 더 눈길이 갔다. 권율 장군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넘었다.

 

딜쿠샤의 여주인이었던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가 쓴 자서전인 <호박 목걸이>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메리는 1889년에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고자 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메리는 연극배우가 되어 세계를 순회하던 중 일본에서 만난 미국인 브루스와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새색시가 되어 1917년에 한국에 들어왔다. 브루스가 한국에서 금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광업으로 큰돈을 번 브루스는 행촌동에 넓은 땅을 사서 1923년에 딜쿠샤를 지었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1942년까지 딜쿠샤는 외국인들의 사교 중심지였고, 그 복판에는 메리가 있었다.

 

메리는 주부며 어머니였고, 연극배우, 작가, 화가, 여행 탐험가였다. 무척 다재다능하고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호박 목걸이>를 쓴 글솜씨는 전문 작가 이상이다. 메리의 남편인 브루스도 금광업 외에 무역업, 고미술품 수집, 기자 등의 일을 했다. 메리는 남편의 유골을 한국 땅에 묻기 위해 1948년에 서울을 다시 찾았고, 1982년에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메리 부부는 서울에 와서 처음에는 서대문 부근에 살았다. 세간살이가 늘어나며 집이 점점 좁아지자 새집을 짓기로 하고 인왕산 자락에 1만 5천 평의 땅을 매입했다. 이곳은 메리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러 다니던 익숙한 장소였다. 원하던 땅을 얻은 부부는 당시 한국에서 제일 큰 벽돌집인 딜쿠샤를 은행나무 옆에 지었다. 신령한 땅으로 여겼던 이곳에 서양 사람이 집을 짓기 시작하자 주민들의 반대가 많았다. 무당은 재앙을 내려달라고 저주를 하기도 했다. 그 탓이었는지 1926년에는 벼락을 맞고 불이 나기도 했다.

 

언덕 위에 있는 이 집은 멀리 관악산과 마주하고, 아래로는 서울 전경이 펼쳐졌다. 너비 14m의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내부는 화려하게 꾸며졌다. 겨울에 얼음을 한강에서 실어와 여름에 사용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메리 부부는 서양인 친구들을 이 집에 초대해 자주 파티를 열었다. 수십 명의 하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생활이었다. 동해안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등 그들의 생활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책에는 오지에서 광산 개발과 운영을 하던 브루스의 고생담도 많이 나온다.

 

지은 지 90년이 넘은 딜쿠샤는 서울 행촌동 주택들 사이에서 비좁게 자리하고 있다. 건축할 당시에는 주위에 집이 없었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그때는 궁전처럼 화려했으나 지금은 열 가구가 넘는 무주택 서민이 들어와 쪽방으로 나누어 살고 있다. 내부 구조는 많이 망가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2006년에 메리의 아들이 한국을 방문해서야 딜쿠샤의 비밀이 밝혀지게 되었다.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책을 통해 1900년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우리 삶을 외국인의 눈을 통해 보게 되는 것도 흥미롭다. 궁핍하고 추한 모습과 함께 민족의식을 잃지 않은 자존심 센 모습도 본다. 부유한 서양 여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결혼 풍습, 장례식, 일상생활이 담담히 그려져 있다. 메리는 미국에서 거주한 지 십수 년이 지나서야 과거를 회상하며 이 회고록을 썼고, 아들이 유고를 정리해서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라는 제목으로 1992년에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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