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계림수필

샌. 2014. 5. 13. 09:26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일기 형식의 수필집이다. 2009년 4월 14일부터 11월 9일까지 일상의 단상이 실려 있다. 짧은 경구가 많이 나오니 아포리즘 수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특이한 점은 내용의 반 이상이 닭에 관한 얘기다. <계림수필(鷄林隨筆)>이라는 제목처럼 집에서 기르는 닭을 보고 배운 삶의 지혜를 적고 있다. 세밀한 관찰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선생은 닭이 개처럼 인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생명 본연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준다고 말한다. 자연의 리듬을 존중하며 천리(天理)에 따라 사는 닭의 모습에는 천지지심(天地之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닭을 키우면서 천지의 이법(理法)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주변의 모든 것이 스승이 된다는 말이 맞다.

 

선생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 역시 만만치 않다. 내 친구는 도올이 너무 엔터테이너 기질을 드러내기 때문에 싫다고 한다. 최근에는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글을 발표해 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집권층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4대강을 비롯한 환경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일관된 도올의 입장을 나는 지지한다.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 또한 존경한다.

 

<계림수필>에서는 학자로서 올곧게 살아가려는 선비의 의지가 읽힌다. 삶으로 살아가는 수신(修身)이 따르지 않으면 배움이란 무의미하다. 이 책에는 선생의 그런 삶의 모습이 드러나서 좋았다.

 

책에서 만난 몇 대목을 인용한다.

 

 

*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품격(品格)을 기르는 것이다. 품격(Style)이란 전문성의 극치에서 발현된다. 그것은 인간 심성의 궁극적 도덕이다. 나는 길가에 피어 있는 살구나 라일락 꽃의 자태에서도 그런 품격을 발견한다. 품격은 심미적 감수성(receptiveness to beauty and humane feeling)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현재의 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상대의 피륙 속에 절대의 수를 놓는 것이다.

 

* 노자의 불인(不仁)이 자연의 실상에 더 충실하다. 공자의 인(仁)은 자연을 거부하는 인간세의 덕성일 수밖에 없다.

 

*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고존(孤存)이다.

 

* 자연은 구극적 경전(經典)이다. 자연이라는 바이블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큰 깨달음을 준다.

 

* 조선의 비극은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인물이 없다함은 무엇인가? 대의(大義)를 위하여 소아(小我)을 버리는, 치열한 삶을 사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대의를 위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지도자의 위세를 확보한 자로서 보편적 가치에 투철함을 말하는 것이다. 보편적 가치란 무엇인가? 다수의 공영(共榮)을 위하여 인간의 이지(理智)를 사심없이 활용하는 것이다.

 

* 인생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

 

* 대오(大悟)는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무여대오(無餘大悟)를 말하는 돈오자(頓悟者)는 궁극적으로 사기꾼이다.

 

* 진정한 대오(大悟)는 사회적 실천을 내포한다.

 

* 인간은 군집할수록 사악해진다. 원래 좀 떨어져 사는 동물이었다. 그래서 도시생활이 농촌생활보다는 악의 성향이 더 짙다.

 

* 마음의 평정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평정은 오직 고독에서만 얻어진다.

 

* 고독을 음미할 줄 모르는 인간은 인(仁)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본질은 고독.

 

* 청명한 가을날 아침, 커텐을 제켰을 때, 공부책상 위로 비쳐들어오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것은 없다. 모든 번뇌를 물리치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삶! 천지간에 태어난 이 육척단신에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으리오!

 

* 권위주의를 버리고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 교육자의 당연(當然)이며 난처(難處)이다.

 

* 개의 인간에 대한 일방적 복종과 따름은 타자의 복종을 사랑하는 인간의 가장 천박한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 반항할 줄 아는 인간이 고귀한 것이다.

 

* 나는 세상을 거스르지 않는 지혜를 많이 배웠다. 그러나 거스르지 않는다고 정의로운 견해를 상실하면 그것은 변절이다. 아니, 그것은 죽음이다.

 

*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다. 그러나 조랑말도 열흘이면 천리를 갈 수 있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가느냐에 있다. 뚜렷한 목적지가 없을 때는 천리마의 날쌤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감(行)'은 '그침(止)'에 그 소이연이 있다. 그침은 감의 완성이다.

 

* 민주주의 기본 원리는 자유(Freedom)가 아니라 협동(Cooperation)이다. 협동이란 대의를 위한 양보이다. 그러나 기득권자는 양보를 하지 않는다.

 

* 교육은 반드시 개념적(conceptual), 도덕적(moral), 신체적(physical) 훈련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 셋 중 하나라도 결하면 그것은 교육이라 말할 수 없다.

 

* 좌우를 막론하고 현상에 대한 비판의식(critical mind)이 없는 글은 글이라 말할 수 없다.

 

* 공자는 인간의 이상사회를 단 한마디로 규정한다. 그것은 송사(訟事)가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질투하고, 음해하고, 고발하는 일이 없는 사회, 그래서 허위와 허례와 허식이 없는 사회, 그것이 곧 지선의 이상사회라는 것이다. 공자는 플라톤처럼 이상사회를 하나의 모델이나 이념이나 이데아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느낌 속에서, 정감 속에서, 의지 속에서 유동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송사가 없는 인간사회, 역시 하나의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이상을 향해 영원히 매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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