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아버지의 일기장

샌. 2014. 5. 28. 10:43

만화가 박재동 선생의 부친이 쓴 일기를 선생이 펴냈다. 선생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건강 문제로 젊은 나이에 퇴직한 뒤 아내와 함께 만화방, 문방구, 떡볶이 장사를 하며 자식 셋을 길렀다. 전 생애가 매일매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의 연속이었다. 부친은 1971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9년까지 매일 일기를 썼는데, 질병의 고통, 아내에 대한 연민,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 꿈을 이루지 못한 남자의 회한 등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선생의 부친은 특별한 것 같지만, 일반적인 우리들의 아버지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겉으로는 엄하고 냉정해 보였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뒷날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면 우리가 알았던 아버지가 아버지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생이 일기 중간중간에 코멘트를 단 걸 봐도, 그때 아버지가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구나, 하고 놀라게 되는 걸 본다. 자식이 바라보는 아버지는 아버지의 극히 작은 한 단면일 뿐이다.

 

일기를 읽으며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많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일기를 쓰셨어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 부모님만큼 자식 교육을 위해, 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도 드물 것이다. 철없던 시절에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아버지는 영농일지는 꼼꼼하게 기록하셨는데 일기는 쓰시지 않았다. 만약 쓰셨다면 귀중한 역사의 기록이면서 가보가 되었을 것이다.

 

옛날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본인의 삶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분들이 고생하는 삶의 보람은 오로지 자식에게서 나왔다.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다. 이젠 자식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고 의지하려고도 않는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자식과 누가 더 멋지게 사는지 경쟁할 거예요." 선생의 말처럼 부모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가꾸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자식도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일기를 통해 나는 자식에게 어떤 아버지로 비쳤는지 되돌아보게도 되었다. 솔직히 부끄러웠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것 같다. 얼마 전에 아내로부터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를 어떻게 느꼈는지를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기억도 못 하는 것들이 아이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었다. 내가 인지하는 못하는 사이에 자녀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엄부(嚴父)가 되었던 것이다. 후회해도 이젠 소용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 줄 기회가 찾아오면 좋겠다.

 

내가 늘 혼자 살기를 소망하는 건 이런 미숙함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을 대하는 따스한 마음이 부족하다. 냉정하고 자기중심적이다. 특히 가족에게 더했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으며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시 자식을 기르게 되더라도 아이들과 가슴을 트고 소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타고난 기질 탓인지 고치는 게 잘 안 된다. 그러면서 자식에게서 내 성향이 발견될 때는 화가 난다.

 

그러나 자식이 생각하듯 아버지가 그런 부정적인 모습만은 아니었다는 걸 헤아려 주길 바란다. 아마 훗날 이 블로그를 본다면 아버지가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고 살아갔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식은 옆에 있어도 부모가 하는 일과 생각은 모르는 법이다. 누구나 그렇듯 부모의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 블로그가 '아버지의 일기장'이 되길 바란다.

 

<아버지의 일기장>에는 평생을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진실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70~80년대 서민들의 고달픈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일기를 보면 선생의 부친은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신 분이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선생이 민중의 견해를 대변하는 화가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분의 꿈은 건강한 몸으로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 치료와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그 꿈은 점점 사그라져갔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러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간 한 인간의 모습에 감동하며 이 책을 읽었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콘택트  (0) 2014.06.07
어제를 향해 걷다  (0) 2014.06.02
아흔 즈음에  (0) 2014.05.21
계림수필  (0) 2014.05.13
호박 목걸이  (0) 201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