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 박철

샌. 2014. 5. 19. 08:27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 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 박철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경제와 성장에 올인한 결과 우리는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발전했고 부유해졌다. 목표로 했던 선진국식 생활 양식을 갖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네 아버지는 고생만 하다가 좋은 세상도 못 보고 갔다." 어머니 말씀의 뜻은 알지만 '좋은 세상'이라는 판단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좋은 세상'은 그런 게 아니라고 어머니에게 대놓고 반박하지도 못하고 있다.

 

미소가 떠오르는 시다. 시인은 외상값을 갚으러 가다가 비가 온다고 술을 마시고, 화원 앞을 지나다가는 자스민을 사 버린다. 술과 꽃은 낭만의 상징이 아닌가. 철없는 남편 때문에 아내는 속앓이를 하겠지만, 돈이라는 물건에 무심한 한 남자의 모습에서, '영진설비'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사라져간 시절을 떠올린다. 요즘 같으면 낭만도 돈이 있어야 한다고 우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악한 조무래기들만 득실거리는 세상이 된 탓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그걸 거역할 수는 없다. 이제 분명한 것은 낭만의 시대도 로맨티스트도 멸종 단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 함민복  (0) 2014.06.01
딱 / 최재경  (0) 2014.05.25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 이기철  (0) 2014.05.10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 함민복  (0) 2014.05.02
화학 선생님 / 정양  (0) 2014.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