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샌. 2014. 6. 8. 08:04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푸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절에 가면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해탈과 번뇌, 정토와 예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더 깊은 뜻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나아가 만물이 불이(不二)라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인지도 모른다. 현대물리학에서도 파동과 입자를 구분하지 못한다. 파동 안에는 입자의 속성이 있고, 입자 안에는 파동의 속성이 있다. 파동으로 바라보면 파동으로 나타나고, 입자로 바라보면 입자로 나타난다. 삐딱하게 종을 치는 여스님의 모습이 미소를 짓게 한다. 저잣거리의 삶이나 수도장 안의 삶이나 역시 둘이 아니다. 번뇌에서 해탈의 꽃이 피어난다고, 종소리가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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