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새해 기도

샌. 2015. 1. 1. 12:23

나이가 드니 새해의 설렘도 줄어든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질 건 크게 없다는 걸 삶으로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새해의 각오나 기도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물거품처럼 사라져갔다. 불꽃놀이는 짧고, 뒤에는 여일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 '복'이나 '행복'이 너무 남발되는 신년의 분위기가 별로 탐탁치 않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열두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TV로나마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결국 한 해가 가기는 갔구나, 라는 느낌에 뭉클해졌다. 작년은 우리 가정에서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그만큼 노심초사하며 보낸 해도 없었다. 다시 되살려보기도 싫어서 한 해의 감상을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세월의 매듭이 있다는 게 고맙다. 달력을 새로 걸며 힘든 과거가 끊어져 나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예년의 무덤덤했던 것과는 달리 올해의 첫날은 나에게도 새롭다. 좋은 일에 대한 기대를 품는 들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의 가치를 다시 되새긴다.

 

<안도현의 발견>에 있는 '새해 기도'를 다시 찬찬히 읽어 본다.

 

 

새해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나라에서 살게 하소서. 행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난데없는 불행으로 마음 졸이지 않게 하시고, 가진 게 많아서 신 나는 사람보다는 가진 것만큼으로도 충분히 신 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가 되더라도 '대박'의 요행 따위 꿈꾸지 않게 하소서. 내 와이셔츠를 적시게 될 땀방울만큼만 돈을 벌게 하시고, 나 자신을 위해 너무 많은 열정을 소비해온 지난날을 꾸짖어주소서. 부디 내가 나 아닌 이들의 배경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내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바라보던 이에게는 남의 자식의 구멍 난 양말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내 말을 늘어놓느라 남의 말을 한 마디도 듣지 못하는 이에게는 파도소리를 담는 소라의 귀를 주소서.

 

백지장처럼 맑고 높은 정신으로 이 풍진 세상을 견디게 하소서. 이 땅의 젊은 아들딸에게는 역사는 멀찍이 서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프게 몸에 새기는 것임을 깨우쳐주시고, 늙고 병들고 나약한 이의 손등에 당신의 손을 얹어 이들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시간을 연장해주소서. 겨울 팽나무의 흔들리는 가지 끝과 땅속의 묵묵한 뿌리가 한 식구라는 걸 알게 하시고, 숲 속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길과 사람 사는 마을의 골목길이 다르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하소서, 우리로 하여 당신이 괴롭지 않은 세상 일구게 하소서.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연이 되면  (0) 2015.01.22
기정 형  (0) 2015.01.10
앙코르와트  (0) 2014.12.23
  (0) 2014.12.12
여행이 좋은 것은  (0) 201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