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기정 형

샌. 2015. 1. 10. 12:56

고향 마을에 기정 형이 살고 있다. 나보다 6살이 위다.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네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연장자다. 형은 어릴 때 집이 너무 가난하여 13살이 되어서야 겨우 국민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7살이었던 나와 같은 1학년이 된 것이다. 당시는 이런저런 이유로 적령기를 놓친 아이들이 많았다. 형과는 워낙 나이 차이가 나다 보니 같은 학년이었지만 함께 놀거나 어울리지는 않았다. 형 친구들은 5, 6학년 아이들이었다.

 

형의 부친은 한학을 하신 분이라 형은 이미 집에서 한글과 한문을 깨친 상태였다. 1학년 수업 내용은 들으나마나였다. 학교는 형식적으로 다녔다고 해야겠다. 공부보다는 빨리 집에 가 일하는 게 우선이었을 것이다. 학업도 워낙 앞서가니 1학년을 마치면서 담임선생님이 바로 3학년으로 진급하는 걸 허락했다. 학년이 달라지면서 형과는 더 멀어졌다.

 

우수한 성적임에도 형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국민학교는 겨우 마쳤지만 집안 형편이 중학교까지는 바라볼 수 없었다. 형은 부모를 도와 가마니를 짜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공부를 못 하거나 집이 가난해 상급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이 마을에는 여럿 있었다. 몇은 대처로 일을 찾아 나갔고, 나머지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형은 달랐다.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을 뿐더러 다른 데는 한눈팔 줄 몰랐다. 성실 그 자체였다.

 

그러나 마음고생이야 오죽했겠는가.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를 오갈 때 형은 가마니를 메고 시골장을 찾아다녔다. 그때 속울음을 삼키며 수천수만 번 결심했다고 한다. 본인은 못했지만 자식만은 원껏 공부를 시키겠다고, 그래야 한이 풀릴 것 같았다는 것이다. 형은 결혼해서 딸 여섯을 두었다. 그리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서 공부 뒷바라지를 했다. 자식들도 예쁘게 자랐고 모두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고향에 내려가면 이젠 활짝 웃는 형을 만날 수 있다.

 

형이 며칠 전 KBS TV의 '아침마당'에 출연했다. 이야기 제목이 '24장의 졸업장'이었다. 자식들이 받은 졸업장을 전부 합치면 24장이나 된다는 것이다. 형은 국민학교 졸업장밖에 없지만 자식들은 남 부럽지 않게 키웠다. 자랑할 만했다. 형에게는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겠는가. 당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자식들의 효도 이야기, 고생 뒤에 찾은 삶의 보람과 행복에 대한 내용이었다. 가슴 뜨거워지면서 화면을 통해 형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딸 여섯을 키우며 어찌 어려움이 없었으랴,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사연도 많다는 걸 나는 잘 안다.

 

그날 오후에 모임이 있었는데 기정 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송을 보고 형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다. 형의 모습을 보니 무척 착한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분 느낌 그대로다. 형만큼 선하고 성실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이웃을 돌보고 보살필 줄도 안다. 내 가족만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배운 것으로는 내가 형보다 나을지 몰라도, 인품으로 따지면 나는 형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사랑 가득한 형의 가정이 부럽다. 나이 들어서 가정의 화목보다 소중한 건 없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서로 간에 존중하고 아껴주며 형제간에 우애하는 집이라면 모든 걸 다 가진 것이다. 고향 마을을 보아도 그렇지 못한 집이 더 많다. 자식도 찾아오지 않고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는 어른도 있다. 자신이 베푼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 형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서 평생을 고향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여느 사람처럼 불평하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형은 못 생긴 나무가 아니다. 사람됨은 가방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번쩍이는 졸업장이 인간을 얼마나 타락시키는지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형에게 말해주고 싶다. "졸업장 없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고향 마을을 지키며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당신이 제일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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