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은는이가 / 정끝별

샌. 2015. 3. 8. 10:15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을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 은는이가 / 정끝별

 

 

작은 토씨 하나도 이렇게 뜻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한 음절에도 깊은 의미가 있거늘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예민한 촉수를 가진 사람은 이런 걸 짚어낼 줄 안다. 누군가 '네'와 '예'의 차이를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다. '예'가 더 공손하고 상하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에는 내가 당신을 나의 상관으로 모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예'라는 말을 자주 쓴다는 건 그만큼 위계질서에 길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어사전에는 '네'와 '예'의 차이는 나와 있지 않다.

 

'은(는)'보다는 '이(가)'로 말하고 싶다. '나는'보다는 '내가', '사랑은'보다는 '사랑이', '꿈은'보다는 '꿈이', 훨씬 더 부드럽고 공손하다.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말이다. 말은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자연스레 '이(가)'가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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