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등대지기 / 진이정

샌. 2015. 3. 13. 12:26

외로운 이는

얼굴이 선하다

그 등대지기도 그랬다

그의 일과 중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일어나자마자 깃발을 단 뒤

한바퀴 섬을 둘러보는 일,

잰 걸음으로 얼추 한 식경이면

그 섬을 일주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곳에서

산보나 하며 살고 싶었다

한 식경이 너무 과하다면

몇 걸음 디디지 않아

이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어린 왕자의

알사탕 별일지라도

 

외로운 이는

마음이 고르다

그 등대지기도 그랬다

심심할 땐

바이블을 읽는다던 그는

할망당의 굿을 믿는

토종 인간이었다

하찮은 잡귀일지라도

박대해선 안된다는 것을

어질지 않은 탐라의 바다에서

애써 깨우쳤는지

그는 만물에 대해 겸허했다

 

외로운 이는

가슴이 저리다

안개 조짐이 있던 날

나는 떠났다

떠나는 나를 위해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가 길게 길게

안개 신호를 울려주었다

짙어가는 연기 속에서

잦아지는 사이렌을 들으며

내 눈은 젖어들었다

아아 나의 등대는

이미 빛을 잃은 것이다

이제 내 가야 할 뱃길은

희미한 그림자 놀음,

누구는 나를 위해

안개의 나팔을 불어대고

누구는 또 나를 위해

안개의 올을 촘촘히 한다

 

- 등대지기 / 진이정

 

 

겉으로 볼 때 등대지기만큼 낭만적인 직업도 없다. 누구나 한 번쯤 등대지기의 꿈을 꿨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가끔 오는 보급선 외에는 인간 세상에서 차단되어 절해고도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도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등대지기가 되는 절차를 알아보기도 했다. 등대지기야말로 인간의 은둔 욕구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줄 것 같다. 외로움을 벗 삼아 살다 보면 속세의 때는 바닷바람에 씻기고 얼굴이 선한 사람이 되지나 않을까.

 

외로움을 위무하는 건 세상 속이 아니라 고도(孤島)인지 모른다. 아픔이 다른 아픔으로 위로받는 것과 같다. 등대지기를 통해 전해지는 시인의 외로움과 슬픔이 절절하다. 끝 연에 나오는 안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나의 등대는 빛을 잃고, 내 가야 할 뱃길은 희미한 그림자 놀음'이라는 시인의 독백이 아프다. 그래도 나를 위해 안개의 나팔을 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인간 세상의 위안이 아닌가. 그렇게라도 믿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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