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흑사탕

샌. 2015. 4. 1. 08:48

환절기가 되면 계절앓이를 한다. 일종의 통과의례다. 증상은 심신이 축 가라앉고 의욕이 없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세상이 생기를 잃는다.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다. 드디어 손님이 찾아오셨구나, 한다. 봄과 가을이 시작될 때가 심하다.

 

꽃이 피었건만 봐도 심드렁하다. 꽃을 보러 가자는 친구의 초청도 사절했다. 옆에서 아내는 걱정이 많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 연례행사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손님은 건드리지 말고 그냥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 제가 지겨워지면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조바심치면 도리어 죽치고 버티는 성질이 있다. 모른 척하는 게 최고다.

 

이럴 때 생각이 나는 게 단 음식이다. 집 앞 슈퍼에서 좋아하는 흑사탕을 몇 봉지 사 왔다. 우울할 때는 달콤한 게 제일이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면서 사탕을 빤다. 빈 껍질이 수북이 쌓인다. 일 년에 먹는 양의 반 이상을 이때에 먹어치우는 것 같다.

 

외할머니는 사탕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내려갈 때는 꼭 사탕을 사 가지고 갔다. 외할머니는 사탕을 입안에 오물거리면서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골목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노." 외할머니는 지극한 외로움을 사탕으로 달래셨다는 걸 내가 사탕을 빨면서야 깨닫는다.

 

슈퍼에서 흑사탕을 찾으니 국산이 아닌 일본제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샀지만 때가 때여서인지 맛만은 입에 착 달라붙는다. 어릴 때의 단맛이 이랬던 것 같다. 포장지에 보니 오키나와의 검은 설탕을 사용했다는데 외국에서 만든 사탕이 어떻게 내 유년의 맛과 이어지는지 모르겠다.

 

음양오행에서 검은색은 짠맛과 연결된다. 단맛은 황색이다. 블루의 보색이 주황색이니 단맛을 나타내는 데는 황색 계열이 어울릴 것 같다. 꿀이나 조청이 그런 색이다. 흑설탕으로 만들어서 검은색을 띠는 것 같지만, 흑사탕의 검은색은 미감(味感)을 자극하는 색깔은 아니다. 그러나 워낙 달콤하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기분이 우울하면 단 것을 찾게 된. 초콜릿, 복숭아 통조림과 함께 좋아하는 것이 흑사탕이다. 올해는 일본제 흑사탕에 매료되었다. 사탕을 빨고 있으면 슬픔이나 우울함도 잠시 잊는다. 그러나 인생이 사탕처럼 달콤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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