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샌. 2015. 7. 9. 12:41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정말 그랬다. 그 시절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었다. 초가지붕 위로 달이 떠오르고, 한쪽에는 모깃불 연기가 매캐한 가운데 멍석 위에 상이 차려졌다. 처마에 남포등이 흔들거렸지만 달빛이 오히려 환했다. 둥근 상 둘에 아홉 명이 둘러앉았다. 드문드문 말소리,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 수저를 놓고 멍석에 누우면 이만큼 뜬 달이 가득 들어왔다. 외양간의 소도 고단한 몸을 쉬며 고개를 딸랑거렸다.

 

지금은 마당 없는 집에 산다. 달 볼 일도 별로 없다. 달빛 대신 번쩍이는 TV 화면을 좇으며 저녁을 먹는다. 식구도 다 흩어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세월 좋아졌다고 한다. 화려한 외피에 가려 드러나진 않지만 사람들 가슴에는 상실감이라는 무거운 납덩이가 들어 있다. 갈증에 시달리고 허덕이게 한다. 그저 존재만으로 넉넉했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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