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쫄딱 / 이상국

샌. 2015. 9. 24. 10:18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느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 쫄딱 / 이상국

 

 

포터 트럭에 싣고 온 짐을 컨테이너에 넣을 때 마음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댔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저 집은 망해서 온 모양이야." 나도 경험한 일이다. 사람들의 연민 어린 눈빛이 그런 거였구나. 돈 많다고 거들먹거려서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먹물 티도 마찬가지다. 도시 사람이 시골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이 많다.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아빠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다고 말하는 천진한 아이 앞에서 모두가 무장해제된다. 껍데기를 벗어던지면 '쫄딱'마저 당당하고 근사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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