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광야 / 이육사

샌. 2016. 3. 9. 22:54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 이육사

 

 

어느 정치인이 "광야에 나가 죽어도 좋다"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광야란 무엇일까. 광야라고 하면 육사의 광야나 예수의 광야가 우선 떠오른다. 이 정도 우주적 스케일이거나 실존적 체험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쉬이 내뱉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정치꾼은 그저 시정잡배의 언어로 말하라. 함부로 광야를 모독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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