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마쿠라노소시

샌. 2016. 3. 26. 11:52

11세기 초에 일본의 궁녀였던 세이쇼나곤이 쓴 수필집이다. 세상과 자연을 보는 여성의 감성이 고운 문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천 년의 격차가 있지만 현대적 감각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책 제목에서 '마쿠라(枕)'는 베개를, '소시(草子)'는 묶은 책을 뜻한다. 즉, 마쿠라노소시는 '베갯머리 책'으로 여성의 사적인 감상록이라는 의미가 짙다. 그렇더라도 책을 읽으며 일본 문학의 전통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쿠라노소시>에는 302편의 글이 있다는데 내가 읽은 것은 37편만 발췌한 축약본인 게 아쉬웠다.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는 완역본이 없는 것 같다. 글은 궁중생활이 중심이 되어 있으나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남녀관계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당시 일본인의 풍습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천 년 전 일본은 자유연애 시대였던 것 같다.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며 즐기는 게 당연했다. 밤에 여자를 만나고 와서 남자는 여자에게 바로 편지를 써 보내야 했다. 금방 떠나 온 것이 슬프고 괴롭다는 것으로 그 내용에 따라 남자의 애정 정도가 가늠되었다. 여자가 답장을 보내면 관계가 지속된다. 이것이 후조 편지다. 어찌 보면 상당히 낭만적인 문화로 보여진다. 이런 글쓰기 문화가 일본 문학의 바탕이 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마쿠라노소시>에는 후조 편지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그래도 제일 아름다운 건 자연에 대한 묘사다. 자연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현대의 우리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감각적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달빛 아래'라는 글을 보면 달밤에 달구지를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달 밝은 밤에 강을 건너면 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수정이 부서지듯 물방울이 튀기는데, 그 광경은 정말이지 근사하다."

 

여성의 섬세한 감성으로 자연을 묘사한 글이 우리 고전 문학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었고, 설령 붓을 들었다 해도 한과 슬픔에 대한 내용이 주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던 것 같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제약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과 인생에 대한 완상도 세이쇼나곤이 고위 궁녀였기에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제 1편인 '사계절의 멋'은 이렇다.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여름은 밤. 달이 뜨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은 보기 좋다. 반딧불이가 달랑 한 마리나 두 마리 희미하게 빛을 내며 지나가는 것도 운치 있다. 비 오는 밤도 좋다.

 

가을은 해질 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세 마리나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지어 날아가는 광경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을 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풍경은 한층 더 정취가 있다. 해가 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겨울은 새벽녘. 눈이 내리면 더없이 좋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도 멋있다. 아주 추운 날 급하게 피운 숯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이때 숯을 뜨겁게 피우지 않으면 화로 속이 금방 흰 재로 변해버려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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