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본래 그 자리

샌. 2016. 3. 16. 19:07

내 생각이란 게 있을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선인이 말했듯,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은 전 세대 사람들이 했던 사유의 잔해에 불과하다. 나만의 생각은 없다. 맹난자 선생의 <본래 그 자리>를 읽다가 든 생각이다.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생과 사, 영혼, 존재의 의미 등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진리를 깨치기 위해 수도자는 일생을 바쳐 정진한다. 이 질문에 바탕하지 않은 철학이나 예술은 없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는 이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본래 그 자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지은이의 지적 탐구 과정을 보여준다. 책에는 동서고금의 철학자, 사상가, 예술가, 종교인들이 등장해서 그들의 삶과 생각을 보여준다. 백과사전식 나열이 아니라 지은이의 의도에 따른 흐름이 있어 중심이 잡힌다. 불교 사상이 기본으로 되어 있는 건 불교철학을 전공한 지은이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다.

 

책은 우울, 고통, 슬픔, 생의 찬가, 존재, 마음, 신, 죽음, 자연 등의 주제로 되어 있다. 각 주제마다 다양한 사람들과 견해가 소개된다. 무엇이라고 결론은 내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사고할 자료를 마련해 줄 뿐이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 고뇌하는 사람이라면 방향을 잡아주는 안내서로 참고할 만하다.

 

내 경우는 대학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이 책에 나오는 도서 대부분이 그 시절에 읽은 것들이다. 인생의 의미와 진리에 대한 열정이 그때만큼 불타올랐던 시기는 없었다. 헛보낸 줄 알았는데 나에게는 사실 보배 같은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내 삶의 초석은 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절망에 빠졌던 젊은 시절, 지은이는 <금강경> 강의를 듣다가 전율하는 한 문장을 만난다.

 

유구(有求)면 유고(有苦)

무구(無求)면 무고(無苦)

 

선생님이 칠판에 쓴 이 글에 가슴속 멍울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한 것이다. 무구(無求)를 씹으며 욕망의 끈을 놓아버리자 갑자기 안개가 걷힌 듯 시야가 확 트여왔다고 한다. 그 뒤로 50년 넘게 지은이의 인생은 무(無)를 알고 체화하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유구면 유고 무구면 무고, 나에게도 이 책에서 건져 올린 귀한 문장이다.

 

내 돌아갈 '본래 그 자리'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으로는 헤아려지지 않는, 그냥 자꾸 읊어보기만 하는, '본래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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