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좌탈 / 김사인

샌. 2016. 4. 10. 10:16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 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 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저녁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 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 좌탈(坐脫) / 김사인

 

 

이렇게 저세상으로 갈 수는 없을까? 동물의 죽음에서 성자의 모습을 본다. 인간계에서는 생사를 깨친 선승만이 좌탈입망(坐脫立亡) 할 수 있다고 한다. 요사이는 웰빙보다 웰다잉(well-dying)에 신경이 쓰인다. 사는 건 부족하더라도 지금 이대로 만족한다. 그런데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두려움도 생긴다. 험하고 고통스럽게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잘 살았다고 잘 가는 것도 아니다. "저녁별 기우는 초저녁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 번 없이 갔다." 마지막까지 의식을 잃지 않고, 몸에서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요히 몸을 벗고 싶다. 그런 천복(天福)이 나에게도 내려올지, 내 기도라면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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