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봄 펜팔 / 반칠환

샌. 2016. 4. 24. 09:03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베낀 듯 작년과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 줄엔 아지랑이 모락모락 안부를 묻고, 두 번째 줄엔 호랑나비 흰나비로 올해의 운세 물으셨죠. 그래도 눅눅한 겨울 다음엔 그만 한 위안도 없었습니다. 짐짓 눈 속 매화 한 점의 간결체로 시작된 당신의 문장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개나리의 만연체, 진달래의 우유체, 벚꽃의 화려체 따라 읽노라면 뭇벌과 새들 소리 시끄러워 눈 감고 귀 막기도 했지요. 젊은 날엔 왜 그리 문장의 배후만 헤아렸는지요. 흰꽃 속의 검은 빛, 꽃잎 속의 붉은 피, 순결 속의 타락, 환희 속의 비명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올해도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쓰기교본'을 그대로 베낀 듯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왜 해마다 다르게 읽는 것인지요. 당신이 그린 봄 편지 속 삽화도 달리 보입니다. 작년엔 절벽에 핀 꽃잎이 금세 천 길 바닥으로 뛰어내릴 것만 같아 애간장 족이더니, 올해엔 꽃잎이 절벽을 거머쥐고 훨훨 날아오르더이다. 저 꽃 다 날고나면 새로 받을 편지도 한결같은 초록의 문체이겠지요. 당신의 편지는 해마다 똑같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은 내가 늘 새로워지는 탓인가요, 다만 내가 늙는 까닭인가요.

 

- 봄 펜팔 / 반칠환

 

 

'펜팔'이라는 말, 오랜만에 접한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펜팔이 유행했다. 해외여행이 불가능했던 때였다. 영어 공부 겸해서 외국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는 게 외국 냄새를 맡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도 상당한 기간 말레이시아, 일본 학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애칭이 케이(Kei)였던 일본 여학생과는 정감 있는 내용에 선물도 자주 나누었다. 일본 풍경 소리가 한동안 우리 집에서 댕그랑거렸다. 그녀 때문에 일본어 성경을 사서 읽기도 했다. 요사이 같았으면 서로 만나보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미지의 펜팔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지는 편지, 봄이다. <편지쓰기교본>을 베낀 듯 해마다 똑같지만 받을 때마다 설레는 소식, 해가 지날수록 애틋해지는 건 무슨 탓일까요. 다만 내가 늙는 까닭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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