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도 보험에 들었다 / 이상국

샌. 2017. 3. 25. 10:26

좌회전 금지 구역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택시기사가 핏대를 세우며 덤벼 들었지만

나도 보험에 들었다

문짝이 찌그러진 택시는 견인차에 끌려가고

조수석에 탔다가 이마를 다친 남자에게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법대로 하자고 했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이나 죽음이 극적일수록

보험금은 높아질 것이고

아내는 기왕이면 좀더 큰 걸 들지 않은 걸 후회하며

그걸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구를 바꾸며

이 세계와 연대할 것이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 나도 보험에 들었다/ 이상국

 

 

아내가 공기 청정기를 사 왔다. 미세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휴대폰으로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는 일이 아내의 일과가 된 지 오래였다. 빨간색이 파란색으로 바뀌는 걸 보며 아내는 안도한다. 물도 사 먹고, 공기도 걸러야 숨 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디스토피아가 멀리 있지 않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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