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단추를 채우며 / 이정록

샌. 2017. 6. 24. 11:07

남자 옷은 오른쪽 옷섶에 단추가 달려 있다 여자 옷은 반대로 오른쪽 옷섶에 단춧구멍이 파여 있다 누구는 좌우뇌의 발달 차이 때문이라 했다 누구는 하인이 채워주기 쉽도록 귀부인의 단추가 옮겨갔다고 했다 모래밭에서 단추 찾듯 동서양 복식발달사를 뒤적였다 동서고금의 민화와 동굴벽화도 설펴보았다 뒤죽박죽이었다

 

칼 찬 병사와 말달리는 전사를 보고야 알았다 젖 물리는 여인네의 눈물 젖은 단추를 만나고야 무릎을 쳤다 남자는 왼 허리에 찬 긴 칼을 재빨리 뽑기 위해, 여자는 보채는 아이에게 젖 물리기 쉽도록 단추를 매단 것이었다 내 수컷이 단추처럼 작아졌다 내 단춧구멍은 죽임의 묘혈, 여자 것은 살림의 숨구멍이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단추, 너무 커서 테두리만 산마루에 걸쳤다 왼쪽 옷섶에 낮달이 떠 있다 아득히 멀지만, 별의 단춧구멍도 수없이 오른편에 뚫려 있으리라 초록 물방울 단추에서 밤하늘을 우러른다 밤낮으로 젖을 물리느라 옷섶 여민 적 없는 은하수, 저 포대기 젖 마를 일 없으리라

 

- 단추를 채우며 / 이정록

 

 

오랜만에 시집을 샀다. 이정록 시인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들의 목록>으로, 올해 박재삼 문학상를 받은 시집이다. 시집에서는 향토성 짙은 생명력이 느껴진다. 군데군데 시인의 해학도 반짝인다. 그중에서 이 시를 골랐다. 시적 상상력이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은 무지개를 하느님의 단추로 보고 있다. 생명을 보듬어 기르는 어머니 우주의 품이 따스하다. 아직은 초록 물방울 단추의 유년기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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