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잠꼬대 아닌 잠꼬대 / 문익환

샌. 2017. 7. 8. 10:46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산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 마음이었거든

한 마음

그래 그 한 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 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 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적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구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 잠꼬대 아닌 잠꼬대 / 문익환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는 G20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북핵 해결의 평화적 원칙을 공표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몇 해 전에 박근혜 정권은 느닷없이 통일대박론을 내세우며 금방이라도 북한을 붕괴시킬 듯했다. 통일 준비가 전혀 안 된 채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새 정부의 평화와 대화 정책이 점점 심각해지는 한반도 정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북한의 행동이 아무리 망나니 같아도 무력을 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불화를 바라는 음흉한 세력에 놀아나서는 안 되겠다.

 

1989년에 문익환 목사는 돌연 평양을 방문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통일 운동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시민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북쪽의 선전술에 이용당한 측면도 있었다. 때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해 초에 당신의 절절한 결심을 드러낸 것이 이 시다.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자라고 비난을 받지만, 목사님 말씀대로 역사를 사는 일은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다. 살벌한 현실일수록 낭만과 상상력이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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