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무한 묘수

샌. 2017. 7. 10. 10:10

두 권으로 된 강철수의 바둑 만화다. 강철수 하면 발바리가 떠오른다. 발바리는 옛날에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끈 캐릭터다. 그 발바리 스타일이 이 만화에도 등장한다.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니던 백수 김달호는 미미라는 여자애를 만난다. 미미는 다섯 살인데 굉장한 바둑 고수다. <무한 묘수>는 이 둘이 합작하여 내기 바둑을 두며 돈을 따먹는 이야기다. 달호가 철딱서니 없는 청년이라면 다섯 살 미미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네 같다. "멋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자신이 멋있는 사람이 되라!" 이것이 유치원 다닐 아이가 할 소린가 말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두 캐릭터에 강철수의 가벼운 유머가 입혀져 만화는 경쾌하고 흥미롭다. 특히 바둑의 진행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은 긴장감으로 아슬아슬하다. 바둑을 어느 정도 둘 줄 아는 사람이 읽어야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둑에 대한 미미의 충고도 새겨들을 만하다. 큰 판의 내기 바둑을 앞두고 미미가 하는 말이다.

 

"바둑이 뭔지 가르쳐 줄까? 쌀을 불에 올려놓고 밥 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바둑이라는 것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쪼다 장문치고 있네. 누가 그딴걸 몰라서 바둑을 지고, 타이틀을 뺏기고 그러냐? 바둑이 불리하다 싶으면 비상조치를 강구해야지, 이 바보야!"

"수(手)라는 건 날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이지, 수를 내려고 한다고 내 지는 게 아냐. 오늘의 이창호를 있게 한 것은 기다림이야. 오직 기다려야 해! 불리할수록 더 깊숙이 발톱을 감추고 기다리는 거야. 아무리 고수, 명인이라도 아무리 판이 우세해도 결승점까지 긴 시간을 모조리 백 점짜리 수만을 놓을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야. 참고 기다리다가 상대가 98점짜리 수를 놓았을 때, 혹은 95점짜리 수를 놓았을 때, 혹은 그만 70점짜리 수를 놓았을 때,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는 거야. 기다리지 못하는 이길 마음이 없는 사람이야."

 

"사람이 바둑을 둔다는 것은 있지.... 알아맞춰 봐. 왜 그렇게들 기를 쓰고 바둑을 두고, 또 이기려 하는 걸까?"

"아, 그거야 일단 바둑이 재미있잖아. 그리고 상대를 자빠뜨리는 쾌감! 혹은 돈을 따먹으려고! 혹은 처자 먹여살리기 위해! 혹은 타이틀을 따려고! 혹은 명예!"

"틀렸어! 신(神)이 만들어 놓은 정수(正手)를 찾아내기 위해 바둑을 두는 거야.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신이 감추어 놓은 수를 찾아서 생각하고 달리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혹은 글을 쓰고 토론을 하고 가르치고 만들고 부수고 연구하고, 저마다 주어진 혼신을 다 하는 거야. 그레 바로 묘수 찾기고 인생이고 삶의 뜻이야."

 

바둑 만화이지만 인생에 대한 가르침은 여느 무거운 책 못지않다. 고수는 바둑을 통해 인생의 묘미를 터득한다. 알파고가 등장하면서 바둑을 대하는 패러다임도 급변하고 있다. 철석같이 믿었던 것들이 허물어지고, 얼토당토 않게 보이는 수가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둑의 세계는 깊고도 깊다. 우리 인생 길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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